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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대의칼럼> '왈우(曰愚) 강우규(姜宇奎)의사에 대한 회상(回想)

일제강점기속에서도 불의(不義)에 타협하지 않고 기개(氣槪)가 넘친 진정한 영웅
등록날짜 [ 2020년08월19일 16시58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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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세계열강의 지배적인 흐름인 일제강점기속에서도 불의(不義)에 타협하지 않고 기개(氣槪)가 넘치는 민족의 자존심을 지킨 의사(義士) 한 분을 소개하고자 한다.

 

- 3월 호국의 인물 선정 왈우(曰愚) 강우규(姜宇奎)의사(국가보훈처 지정)

지난 19867월 충남 천안 목천면 남화리에 있는 독립기념관에서는 애국지사 '왈우(曰愚) 강우규(姜宇奎, 1855.7.141920.11.29)'선생의 추모시비 제막식이 성대히 거행되었다.

당시 의사께서 순국한 지 67년 후에야 건립이 된 그 추모시비는 강 의사 유족회와 강 의사의 출신군인 평남 덕천 군민회 및 진주 강씨 중앙종회의 적극적인 노력과 협찬에 의해 이루어졌다.

의사(義士)께서는 일제강점기 9년 후인 191992일 서울 남대문역전에서 조선 총독으로 부임 중인 사이또 미노루를 살해하기 위해 몰래 반입하여 지니고 있던 영국제 폭탄을 던져 대한민국의 식민지배의 뼈아픈 참 역사의 진실을 전 세계에 알렸던 것.

 

의사(義士)께서는 폭탄투척 거사 일에 행사장에서 한 일본형사가 바지 사이에 철렁 철렁거리는 폭탄을 일찍이 발견했으나 강 의사(義士)는 의연하게 순간의 기지(奇智)로 넘기고 마침내 행사장에 들어가 폭탄을 담대하게 투척했다.

주변의 철모르는 아이들이 이구동성으로 저 영감이 투척했다고 말했으나 일본 순사는 어떻게 노인이 그렇게 멀리 폭탄을 투척할 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으로 현장에서 체포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렇게 유유히 사건현장에서 나온 의사(義士)는 거사 며칠이 지나지 않아서부터 주변에 아무 죄 없는 수많은 사람들이 연루(連累)되는 것을 가슴 아파하며 의거 16일 만인 917일 서울 가회동 하숙집에서 종로경찰서로 직접 전화를 걸어 내가 투척했으니 다른 죄 없는 사람을 문초(問招)하지 말고 나를 잡아가라고 담대하게 맞섰다.

이때 일본인의 앞잡이인 고등계 순사 김태석은 이를 악용해 내가 추적 끝에 마침내 폭파범을 체포했다고 의기양양하게 거짓으로 역사를 날조하고 말았다.

<이하 생략>

[네이버 지식백과] 강우규 [姜宇奎] - 조선총독 처단 (독립운동가, 이달의 독립운동가)

 

- 왈우(曰愚) 강우규(姜宇奎)의 추모비

그 자랑스러운 우리의 왈우(曰愚) 강우규(姜宇奎) 의사 추모비()의 이면에는

有身無國

豈無感傷

몸은 있어도 나라가 없거늘 어찌 감상조차 없겠는가 라는 절구(絶句)시가 새겨져 있다.

 

이뿐 아니라 왈우(曰愚) 강우규(姜宇奎 의사(義士)께서는 일본치하(治下)의 단두대에서도 담대(膽大)하시고 아래의 시구절과 같이 당당(堂堂)하였다.

 

斷頭臺上 猶在春風 (단두대상 유재춘풍) 단두대상에 홀로서니 춘풍이 감도는구나

有身無國 豈無感想 (유신무국 기무감상) 몸은 있으나 나라가 없으니 어찌 감회가 없으리오.

 

이러하듯 우리들은 시대를 넘나들며 언제 어디에서나 충효사상(忠孝思想)의 으뜸이고 참 선비정신을 대한민국의 국민)이라면 누구나가 애국애족(愛國愛族)하는 희생정신(犧牲精神)을 피 끓은 가슴속에 가지고 있을 것이다.

역사를 왜곡, 날조하고 정의롭지 못할 때는 누구든지 어디에서나 일어서는 우리 민족성이다. 다음 달 92일이면 역사적인 의거(義擧) 현장인 서울역 광장에서 101주년기념식을 갖게 된다고 전한다.

우리 모두 이날만큼은 옷깃을 여미고 '왈우(曰愚) 강우규(姜宇奎) 의사'의 숭고한 뜻을 기리며 숭조돈목의 정신으로 다 같이 숭상(崇尙)해 봤으면 좋겠다.


<편집자 주>
강 우규(宇圭)--소감공 26세
1855~1920 [조선] 독립운동가. 자는 찬구(燦九), 호는 왈우(曰愚). 평남 덕천(德川)출신. 1884(고종 21)년 함남 홍원(洪原)군 용원면 영덕리 68번지에 이주하여 장로교 신자가 되고, 사립학교를 세워 경영하다가 1911년 블라디보스톡의 노인단(老人團)에 가입 중국요하에 신흥동(新興洞)부락을 설립하고 광동학교를 창설했고 길림성(吉林省)의 지부장이 되어 시위운동을 전개했다.


이듬해 조선총독으로 부임하는 사이토의 암살을 위해 블라디보스톡으로부터 상경(上京), 9월 2일 사이토가 서울역에 도착하여 마차를 타려는 순간 폭탄을 던졌으나 사이토의 살해는 실패하고 신문기자와 수행원 37명에게 중경상을 입혔다.


감시망을 뚫고 장익규(張翊奎). 임승화(林昇華)의 집으로 숨어 다녔으나 밀정 김태석(金泰錫)에게 피체(被逮), 옥중생활을 하다가 1920년 11월 29일 사형집행(死刑執行)으로 순국(殉國)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중장(重章)이 수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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