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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대의 칼럼>현암 이을호선생과 '간양록'

강의 자료로 ‘간양록’을 가르쳐 영광중등학교 1~3회 졸업생들은 그 수업 의미 알고 있을 것!!
등록날짜 [ 2020년10월28일 10시55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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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명을 하자면 간밤(10월 26일)의 술자리가 너무 깊었다. 사실 현암(玄庵) 이을호(李乙浩)선생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다는 시건방진 한쪽만의 생각이 참으로 부질없다.

현암 이을호선생의 기념비 상념(想念)
한국학 연구에 독보적 업적 ‘한국학의 아버지’ ...수은강항선생과 세대를 초월한 '인연'의 끈
 
http://www.edaynews.com/detail.php?number=30891&thread=02r07
 등록날짜 [2019년11월06일 21시58분]


이 기사만이라도 다시 검토(檢討)했어야!!

금호아시아나 이원태 부회장을 오찬장에서 만나 대뜸 첫 질문에 보기 좋게도 와그르르 무너져 내렸다. 당연하게도 미리 갖췄어야하는 준비부족에 한방에 KO패 당하고야 만다.


지난 9월 25일 수은선생의 문적인 ‘간양록’ 중심의 국제학술세미나에 대해서도 이미 잘 파악하고 있었다. 저음으로 차분하게 일러주는데 무척 당황했고 오로지 메모하기에 급급했고 흐르는 식은땀을 훔치며 경청하기에 바빴다.


조용히 돌이켜 보건데 모든 잘못을 한 짐 가득 이고지고 있는 것 같아 더 죄송한 마음뿐이다.


정확한 년도는 아직 불분명하지만 1940년대에 일본경찰서장이 형사를 앞세우고 분서(焚書)라는 만행을 자행했다. 광기어린 극우 일본인들의 우월주의에 걸림돌이 ‘간양록’이 되었던 것이다.


30대의 혈기어린 청장년이 지켜본 그날의 기억은 아마도 뇌리에 오래도록 기억되었나보다.


그날 이후 현암 선생은 ‘간양록’을 구하고자 전국을 수소문하다가 그나마 영광지역에서 가까운 인접지역인 고창군 진주강성 집성촌에서 그 당시 기와집 한 채 값을 지불하고 ‘간양록’ 을 구입하고야 만다.


이회장의 대학시절 당시 회고담(懷古談)을 들어보자면 증조모께서(103세 장수함) ‘네 아버지는 참으로 유별났다. 무슨 고서적(古書籍) 같은데 그걸 기와집 한 채 값이나 주고 구입 했단다’


계속해 증조모의 말씀을 기억한다. ‘무슨 일인지 고향인 영광지역에 후학들을 위해 학교를 세운다며 민립고등중학교, 여자고등중학교(영광중학교, 영광여자중학교 전신)를 문전옥탑을 팔아 건립했단다.'는 말씀과 현암선생의 1~3회 졸업생들 제자들에 의한 증언은 학'교를 2개월 만에 뚝딱 만들어 개교(開校)를 하고 그 강의 자료로 ‘간양록’을 가르쳐 그 수업에 의미를 알고 있다.‘고도 증언(證言)한다.


현암 선생의 기행(奇行)에 가까우면서도 선각자다운 면모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1948년 정부수립이 되자 가차(假借) 없이 민립 중등학교를 국가에 기부하고 이젠 개인보다도 정부가 나서서 교육을 도맡아야 한다며 광주로 올라와 전공을 찾아 전남대학병원 약국(藥局)장으로 비로소 전문가로서 안착을 하는듯했다.


음수사원(飮水思源)의 뼈있는 고사성어가 비수처럼 꽂이고...

어찌해서 앞만 보고 달렸을까?! 안타까움에 더 민망했다. ‘간양록’ 그 수은선생의 문적(文籍)을 국가지정 문화재로 가는 국제학술세미나를 관망(觀望)하고 있으면서 현암 선생의 장남으로서 여러 생각이 들었을 게다. 번뇌(煩惱)에 가까운 탄식(歎息)과 안타까운 생각도 했을 것이다.


그런 예견(豫見)에 부끄러움이 또 다시 몰려왔다. 다시 1950년대 한국전쟁의 이야기를 펼쳤다. 어쩔 수 없이 흑산도로 피신(避身)들어가고 이 부회장은 목포에서 유달 초등학교를 다녔다고 한다.


이번에는 어머니에 대한 회고담을 말씀하기 전에 현암 선생의 직업을 어떻게 알고 있느냐며 물어와 당연하게 약사라고 말하자 한의사를 더한다. 그래서 흑산도로 피신(避身)할 때 가방하나에 ‘간양록’과 체온계하나만 담고 거기에서 환자를 돌보기도 했다고 한다.


대뜸 흑산도에는 진주강성 일가들의 집성촌이 많아 피신하면서 일가들의 도움 받은걸 전해 들은걸 기억해 오롯이 ‘간양록’을 지키셨듯 당신도 역지사지(易地思之)입장에서 후손들의 도움을 받았음을 상기시켜드렸더니 그럴 수도 있었겠다고 긍정(肯定)을 표했다.

소금학교장 이을호 선생의 졸업장

현암 선생은 흑산도에서도 유명세를 떨쳤다. 어쩌면 약학을 전공했기에 소금에 관심이 많았으며 흑산도에서 비금도를 오르내리며 비금도에 소금학교를 세워 졸업생들에게 소금학교 졸업장을 수여했다.


1950년 한국전쟁은 38선 이하에 있는 전라도 쪽은 물론 전쟁 포화(砲火)속에서도 소강상태였고 조용했지만 그 전쟁통인 1952년도에 목포에서 민족문화사에 발행을 맡겨 ‘간양록’을 발간했으니 현암 선생의 수은선생에 대한 애정은 각별하고 유별했다.


이후 1975년에 한국명저대전집에 현암선생이 번역한 간양록이 들어가 서서히 ‘간양록’이 수면위에 떠오르고 1978~9년 후반에 드디어 대하역사드라마 유명작가인 신봉승작가가 현암 선생을 찾아와 드라마 ‘간양록’이 조용필의 노래와 함께 빛을 보게 된다.


이후 1984년 양영각에서 다시 재발간이 되고 동시에 일본어판(2005년 서해문집)이 나오면서 끊임없이 발간이 되어 마침내 2005년 현암 전집을 내면서 거듭 국역 간양록이 선보인다.


다시 이원태부회장은 수은정에 대해 물어온다.


사실 수은정에 대해 너무 작은 연못이라서 못마땅한 생각이 많은 게 사실이다. 그런데 그 역사가 1960년으로 거슬러 올라가 현암 선생에 의해 탄생됨을 알고서 민망했다.


현암 선생은 수은선생 뿐 아니라 다산 정약용선생의 연구가이기도 했다. 1957년과 1958년에 다산초당을 짓고 그 무렵에 수은정을 지었으니 교통도 불편했던 당시 강진과 영광을 넘나들며 바삐 동분서주하며 다녔던 현암 선생을 떠올리며 괜히 속절없음에 연신 땀만 닦고 있었다.


이후 현암 선생은, 내산서원 복원을, 김재식과 허련 전남도지사  때인 1974년 무렵에  고건 전남도지사 시절인 1977년에 내산서원을 전남도지정으로 반석위에 올려놨으니 그 공은 후대(後代)에 엄청난 보람을 가져다 줬다.


(이후 전남도 지방문화재 14건 지정예고 뉴시스  2008.03.18.【광주=뉴시스】 전남도는 18일 "신안 흑산도 '상라산성'과 조선중기 성리학자인 수은 강항 선생의 '필사본 건거록(간양록)' 등 14건을 지방문화재로 지정예고했다"고 밝혔다.)


이러한 현암 선생은 전주이씨 양도공파로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형인 이원계 장군으로 이성계가 호랑이에 물려 죽을 순간에 화살로 호랑이를 죽인 설화(說話)로도 유명하지만 작은아버지를 도우라고 자식들에게 유언하고 본인은 역성혁명의 부끄러움에 자결을 선택한 무장(武將)중의 무장이다.


필자는 ‘강항연구소’설립이 목하(目下)진행 중임을 말하면서 동토 윤순거 선생을 함께 봉향(奉享)하는 은혜를 아는 혈족(血族)임을 강조했다. 동토선생과 함께 현암 선생에 대한 학술회를 제안했더니 한사코 손사래를 친다.


은근과 끈기를 가진 확실한 유전자를 가진 집안에서는 기필코 이루는 습성을 무시하지 못한다. ‘동토선생에서 현암’까지라는 돌출적인 생각으로 수은선생의 문인록과 은시록의 88명의 제자들을 위시해 연구의 중요성을 거듭 갖는다.

전남 문화재의 탁월한 전문가 김희태 문화재위원의 집념(執念)

27일 강항 휘초 16종 21책의 일부분인 사서오경 PDF파일을 어렵게 일본 공문서관 내각문고를 통해 구해 이메일로 보내온 자료에 감사를 표했더니 28일 오늘 아침 전화가 왔다.


수은선생의 문적인 ‘간양록’ 필사본(내산서원 소장)과 ‘간양록’ 간행본의 차이를 엄격히 구분해 중심을 잘 잡아야한다고 강조의 톤이 높다. 이 땅에 ‘간양록’ 필사본은 오직 두 권이 아이러니하게 말하자면 유일무이(唯一無二)하다.


언필칭 규장각(奎章閣)이 소장(所藏)하고 있는 ‘간양록’ 필사본은 내산서원에 소장되어 있는 ‘간양록’ 필사본 그 다음에 필사가 된 서책(書冊)이라고 김희태 위원은 단정(斷定)한다.


이러하듯 ‘동토 윤순거에서 현암선생’까지 학술대회의 필요성과 가치적 의미를 다시 되새기며 서서히 군불을 지펴야겠다.


내산서원의 신도비와 묘정비

부끄러운 건 또 하나가 더 존재한다. 내산서원에는 수은선생의 신도비는 있으나 내산서원내에 묘정비가 아직까지 존재하지 못한다. 두어 시간의 오찬에 분위기파악도 못하고 수은선생의 묘정비 추진위원회를 말하며 추진위원장을 맡아 달라는 부탁을 했으니 될 법이나 하는 부탁인가?!


그 외에도 부끄러운 대화가 더 존재하지만 차마 말을 꺼내기조차 한없이 부끄러워 감히 생략을 안 할 수 없다.


끝까지 귀한(?)손님으로 격을 갖춰 좌석 배치까지 챙기시고 에스퀄레이터 까지 마중에 당황했지만 필자는 끝까지 선친의 전집을 책갈피에 색지와 메모를 해 주면서 전달해 주는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현암 선생을 현몽(現夢)하듯 떠 올리며 발걸음을 다음 장소로 재촉했다.

현암 선생과 내산서원

1952년 현암 이을호(李乙浩)의 한글 역 초판『간양록』이 간행되었다. 1983년 癸亥(계해) 五月(오월) 國立光州博物館長(국립광주박물관장) 哲學博士(철학박사) 李乙浩(이을호) 謹撰(근찬) 향토문화개발협의회장 鄭埰均(정채균) 謹書(근서) 睡隱姜沆先生記念事業會(수은강항선생기념사업회) 謹竪(근수) 睡隱姜沆先生記念事業會(수은강항선생기념사업회)창립한 이후 영광내산서원보존회 창립해 수은강항선생기념사업회와 내산서원 성역화사업에 전력을 다 한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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