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바일모드 | 로그인 | 회원가입
2020년11월28일sat
 
티커뉴스
OFF
뉴스홈 > 사설ㆍ칼럼 > 김세곤칼럼
kakao 트위터로 보내기 싸이월드 공감 네이버 밴드 공유
쪽지신고하기 기사글확대 기사글축소 기사스크랩 이메일문의 프린트하기

<김세곤칼럼>카프카와 프라하 (10)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카프카의 죽음
등록날짜 [ 2020년11월08일 18시22분 ]


[ 더 큰 세상(正論直筆)위해 구독 YOU ME 클릭 ]


카프카(1883∼1924)는 1922년 7월 1일 자로 노동자산업재해보험공사를 그만둔다. 이윽고 그는 6월 23일부터 9월 18일까지 보헤미아 남부의 플라나에 있는 누이동생 오틀라의 여름 별장에서 지냈다. 그는 책상에 앉아 있어도 아무 일도 하지 못하고, 심지어 골목에 나가지도 못할 정도로 건강이 악화되었다. 11월 29일에는 자신의 작품을 불태워 달라는 유언을 남긴다.

1923년 7월 5일에 카프카는 누이동생 엘리 부부와 함께 발트해의 온천장 뮈리츠로 휴양을 떠난다. 뮈리츠에는 헤르만 박사 요양원이 있었고, 이 요양원 근처에는 유대인 문화학교가 임해학교를 열고 있었다.


이곳에서 카프카는 보모로 일하고 있던 인생의 마지막 동반자 도라 디아만트(1898~1952)를 만난다. 카프카는 40세, 디아만트는 25세로서 15살 차이였다. 카프카는 동부 유대의 하시디즘 명문가 출신인 그녀에게 한눈에 반했고, 디아만트는 카프카가 폐결핵 말기 환자라는 것에 괘념치 않았다.    

카프카는 곧 프라하로 돌아온다. 그는 다시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온갖 반대를 무릅쓰고 프라하에서 탈출하려는 계획을 관철시킨다. 

9월 23일에 카프카는 베를린행 기차에 몸을 싣는다. 그곳에는 도라 디아만트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카프카는 베를린에서 채 6개월도 살지 않았다. 제1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인 독일의 인플레는 극심해서 지폐 10억 마르크의 가치가 금 1마르크에 불과했다.

카프카는 프라하에서 보내주는 지원금이 큰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송금이 지체될 때마다 굶주림이 걱정이었다. 농산물을 담은 소포들도 필요했다. 특히 프라하산(産) 버터는 요긴했다.

그러나 카프카는 경제적으로 어려웠음에도 불구하고 연극 입장권은 꼭 구입했다. 심지어 카프카는 물가고 때문에 베를린을 떠나게 될까봐 두려워했다. 인생의 동반자 도라 디아만트는 온갖 어려움을 여유 있게 극복해 냈다.


그녀는 보금자리를 만들어냈고, 카프카를 위해 언제나 살기 좋은 분위기를 만들어내려고 신경 썼다. 오히려 그녀는 고난으로 인해 더욱 강하게 단련된 것처럼 보였고, 카프카는 이 지상에서 가장 기분 좋게 보호받고 있다고 느꼈다.

1923년 말에 카프카는 고열과 오한에 시달린다. 의사는 일 회 왕진에 160크로네라는 고액을 요구한다. 카프카의 병세에 놀란 가족은 1924년 2월 23일에 외삼촌 지크프리트 뢰비를 베를린으로 보낸다. 의사인 외삼촌은 조카에게 요양원 치료를 권한다.

3월 17일에 카프카는 다시 프라하로 돌아온다. 그는 말하기도 어려웠다. 카프카가 오스트리아 남부의 오르트만에 위치한 '빈 숲' 요양원에 입원했을 때 그의 몸무게는 겨울옷을 입고서도 겨우 49㎏에 불과했다. 그는 후두까지 암이 퍼져 말을 하지 못하게 된다.

4월 9일과 10일에 카프카는 전문의의 진찰을 받고 4월 19일까지 후두 클리닉에 입원한다. 이후 카프카는 빈 근교 키어링에 있는 '호프만 박사 요양원'으로 옮겼다.

카프카는 5월 중순쯤부터 마지막 작품인 「요제피네, 여가수 또는 쥐의 족속」를 집필했다.


이 작품의 주제는 여가수와 민족 사이의 균형이다. 요제피네의 노래는 민족을 지배하는 비범한 힘을 지니고 있다. 민족은 그녀의 노래에 감동 받는다. 그러나 기묘한 것은 그녀의 노래가 우리가 지금까지도 막연하게 기억하고 있는 민족 고대시대의 음악과 노래가 아니며, 쥐들의 평범한 휘파람 소리와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그녀가 명백하게 체험한 것은 예술가의 절대적인 자유는 이 세계의 삶에서는 획득 불가능하다는 사실이었다. 요제피네는 예술의 특권을 포기하고 사라진다.  

1924년 5월 초에 의사들은 카프카의 치료를 포기하겠다고 선언한다. 5월 6일에는 로버트 클롭슈톡이 도라 디아만트와 함께 카프카를 간병하기 위해 키어링에 도착한다. 암의 고통은 상상을 초월했다.


카프카는 클롭슈톡에게 모르핀 주사를 놓아 달라고 간청한다. 카프카는 알코올 주사와 진통제 피라미돈을 맞는다. 누이동생 오틀라와 외삼촌 지크프리트 뢰비, 그리고 막스 브로트가 키어링으로 온다. 이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카프카는 6월3일에 사망한다. 나이 41세였다.

주치의 로버트 클롭슈톡는 다음과 같이 글을 썼다.

“그의 얼굴은 아주 경직됐고, 엄숙했으며 다가가기 어려웠다. 그의 정신은 순순하고 엄격했으며, 얼굴은 아주 고귀하고 아주 오래된 종족의 왕과 같았다.(편영수, 카프카와 삶과 문학,『변신 ·단식광대』,창비, 2020, p 214)

사진 1 카프카의 여동생 오틀라(1892-1943) 

올려 0 내려 0
김세곤 이 기자의 다른뉴스보기
무통장입금 정보입력 입금자명 입금예정일자
(입금하실 입금자명 + 입금예정일자를 입력하세요)
[관련뉴스]
<김세곤칼럼> 임오군란(1)
<김세곤칼럼>카프카와 프라하 (9)
트위터로 보내기 싸이월드 공감 네이버 밴드 공유
기사글확대 기사글축소 기사스크랩 이메일문의 프린트하기
<김세곤칼럼> 임오군란(1) (2020-11-11 15:37:55)
<김세곤칼럼>카프카와 프라하 (9) (2020-11-01 18:44:43)
광주 전체 중학교 원격수업 돌...
광주시, 백운고가 철거 완료
2광주시, 020국제광융합산업전...
이철 전남도의원, 도 발주공사 ...
<김세곤칼럼>두 얼굴의 ...
곽태수 전남도의원, ‘천일염산...
순천시 코로나19 위기극복, 퇴...
현재접속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