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4년 1월 10일 밤에 일어난 고부 농민봉기는 고부군수 조병갑의 탐학 때문이었다. 조병갑은 거금 7만 냥을 바쳐 1892년 4월 28일에 고부군수로 임명되었다. 그는 부임하자마자 수탈에 나섰다. 1893년은 흉년이 들고 전염병마저 돌아 농민들의 생활이 비참했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탐학했다.
그런데 이런 수탈은 조병갑만이 아니었다. 양전 사무를 맡은 호남 균전사 김창석과 세곡 업무를 담당한 전운사 조필영, 그리고 전라도 관찰사 김문현도 마찬가지였다.
1890년 12월 30일에 고종은 전 승지 김창석을 호남 균전사(均田使)로 삼았다. 균전이란 “전품(田品)의 공정한 사정에 따라 백성들의 부역을 균등히 하려 한다.”는 뜻이다.
김창석은 전주의 아전 집안으로 대대로 부유하여 농장 수입이 수 만석에 이르렀다. 과거에 급제한 다음 날 그는 고종에게 10만 냥을 상납하니 고종은 크게 기뻐하였다.
그런데 고종은 김창석에게 오랫동안 상납받고자 갑자기 출세시켜 주지 않았다. 김창석은 누차 승진하여 승지에 이르기까지 고종에게 상납한 돈이 수백만 냥이었다. (황현의 매천야록)
김창석이 호남 균전사가 된 당시 전라도는 2년간 흉년으로 가는 곳마다 황폐하였다. 1892년 3월에 김창석은 보고서를 올려 ‘진전(陳田 토지대장에는 등록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경작하지 않는 토지)을 개간한 것은 3년 동안 백성들이 경작하게 하였는데 김제 등 7개의 읍(邑)에서는 진전이 아직 개간되지 않았고, 물에 떠내려간 땅이 도합 3,744결(結)이어서 이에 대한 조세를 모두 감면하고, 새로 개간한 백성들에게는 각종 잡역(雜役)도 감면해줄 것을 요청했다. 이에 의정부는 특별히 5년을 기한으로 조세 납부를 면제해주자고 하니 고종이 윤허하였다.
1893년 2월 27일에도 김창석은 김제 등 7개 고을에서 새로 개간한 면적 158결(結)도 전례대로 특별히 정세(停稅)를 요청하자 역시 윤허하였다.
그런데 균전사로 김창석은 이 지역 출신임을 이용, 이미 개간된 땅까지도 진전이라 하여 이를 다시 개간한 것처럼 허위로 기록하였다. 그리고 국가에는 면세를 청하고 실제로는 징세해 착복했으며, 일부의 땅을 자기 명의의 토지로 전용하는 등의 부정을 자행하였다.
균전사 김창석의 수탈은 특히 고부가 심하였다. 1894년 갑오농민봉기 때 “균전사가 폐단을 없앤다고 하는 것이 도리어 폐를 낳는다.”라는 폐정개혁(弊政改革) 요구 사항까지 나타났다.
이러자 1894년 5월 20일에 사과(司果) 이설이 상소를 올려 현재의 폐단을 논하고 전운사 조필영, 균전사 김창석, 전(前) 고부군수 조병갑, 안핵사 이용태, 전라 감사 김문현 등의 죄상을 규탄하였다.
5월 21일에 의정부는 김문현, 조병갑, 이용태, 조필영에 대해서는 이미 처분을 내렸으니 다시 결재받을 것이 없지만, 전(前) 균전사 김창석이 백지징세(白地徵稅 농사짓지 않은 땅에 세금을 매김)한 것에 대해서는 사람들의 논의가 준엄하고 공론(公論)이 더욱 들끓고 있으니 처벌하라고 하자, 고종은 윤허하였다.
이 당시 조병갑은 고금도에, 조필영은 함열현에, 이용태는 금산군에, 김문현은 거제도에 유배 중이었다. 9월 17일에 의정부가 균전사 김창석의 백지징세 혐의를 처벌하라고 다시 아뢰자 9월 19일에 고종은 김창석을 홍주목에 유배보냈다.
그런데 1895년 7월 3일에 고종은 대사령(大赦令)으로 민영준, 조병식, 민형식, 이용태, 김문현, 조필영, 조병갑 등 279명을 사면하였다. 이 때는 고종과 중전 민씨가 러시아가 주도한 삼국 간섭 이후 인아거일(引俄拒日 러시아에 접근하고 일본을 멀리하는)의 시기였다.
그래서 8월 19일에는 민영준을 궁내부 대신으로 내정하여 궁중에서 연회까지 열었는데, 8월 20일에 새벽에 민왕후가 시해당하는 을미사변이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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