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5년 (고종 32년) 8월 20일(양력 10월 8일) 새벽 5시경에 을미사변이 일어났다. 민왕후가 시해당한 것이다. 나이 44세였다.
이 날의 ‘고종실록’을 읽어보자. “묘시(卯時)에 왕후(王后)가 경복궁 곤녕합(坤寧閤)에서 붕서(崩逝)하였다.【(중략) 난동은 점점 더 심상치 않게 되어 왕후가 거처하던 곳을 잃게 되었는데, 이날 이때 피살된 사실을 나중에야 알았기 때문에 즉시 반포하지 못하였다.】”
이로부터 두 달이 지난 10월 15일에 고종은 민왕후의 승하를 반포하였다.
"지난번 변란 때에 왕후의 소재를 알지 못하였으나 날이 점차 오래되니 그날 세상을 떠난 증거가 정확하였다. 8월 20일 새벽 5시경에 왕후가 건천궁 곤녕합에서 승하하였노라."
당시에 고종은 민왕후의 장례를 치르지 못하고 있었다. 고종은 매월 삭망(음력 초하루와 보름날)이면 친히 제문을 지어 제사를 지낼 정도로 민왕후를 그리워했다
사람들은 고종을 고려 공민왕에 비유하였다. 공민왕은 왕비인 원나라 노국공주가 죽자 너무 슬퍼했다. 그런데 고종이 민왕후를 그리워한 것을 이용한 교활한 사람들도 있었다. 황현의 『매천야록』에 전해진다.
# 환관의 장난질
1896년에 고종은 민왕후의 죽음을 애통해 마지않아 말만 나와도 문득 눈물을 줄줄 흘렸으며, 경대(거울)와 대야 등을 보고도 탄식하면서 어루만지며 차마 놓지 못했다.
한 환관이 자기와 절친한 사람의 이름을 써서 민왕후의 경대 속에 접어서 넣어두었다. 고종이 그것을 발견하고 돌아보며, “이 웬 사람이며, 무슨 연고로 여기에 적혀 있는가?”라고 물었다.
그 환관은 울먹이며 대답하기를, “마마께서 살아계실 때 이 늙은 몸에게 수령 재목을 물으시기에 제가 감히 이 사람을 아뢰었던 것입니다. 마마께서 손수 써서 보관하신 모양인데, 변고로 말미암아 기용되지 못했습니다.”라고 하였다.
고종은 “그런 일이 있었구나. 슬프도다.” 하고는 곧 그 사람을 군수로 임명하였다. 이처럼 고종은 민왕후를 추념하는 마음이 간절하여 고종을 고려 공민왕에 비견했다. (황현 지음 · 임형택외 옮김, 역주 매천야록 상, p 509)
그런데 이 시기는 고종이 아관파천한 1896년 양력 2월 11일 이전으로 보인다. 고종이 이날 새벽 6시경에 경복궁에서 가마를 타고 몸만 빠져나와 은밀하게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겼으니 민 왕후의 물품인 경대 등을 챙겨 가져갔을 리 없다.
# 명성황후의 유혼을 본다는 성강호의 출세
민왕후는 고종이 대한제국 황제가 된 1897년에 이르러 명성황후로 추존되었고, 장례는 1897년 11월 21일에 서울 청량리 천장산 아래 홍릉에 묻혔다. 고종은 장례를 치른 이후에도 명성황후를 못있어 했다. 홍릉에 잠든 황후를 보러 가기 위해 종로에서 청량리까지 전차를 놓기도 했다.
1899년에 충주 사람 성강호가 귀신을 잘 본다고 소문이 났다. 고종은 그를 불러 명성황후를 볼 수 있도록 하라고 명령했다. 하루는 경효전(景孝殿)에서 다례를 행하였다. 경효전은 경운궁(지금의 덕수궁)에 있는 명성황후의 신주를 봉안한 전각이다.
이 때 성강호가 갑자기 계단 아래에 엎드렸다. 고종이 그 까닭을 묻자 그는 “황후의 신령이 오셔서 지금 자리에 오르고 계십니다.” 하였다.
그러자 고종은 자리를 어루만지면서 대성통곡을 하였다. 성강호는 “그렇게 통곡하시면 신령이 다시 임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다. 이 말에 고종은 억지로 눈물을 거두었다.
이때부터 경효전이나 홍릉에서 제사드릴 일이 있으면 고종은 성강호에게 매번 “황후가 오고 있느냐? 안 오느냐?”라고 물었다. 그는 “유명(幽明)이 달라 혹 강림하기도 하고 강림 안 하기도 합니다.”라고 말했다.
고종은 명성황후가 생각나면 매번 성강호를 궁중으로 불러들였다. 그는 1년 사이에 벼슬이 뛰어올라 협판(차관급)에 이르렀으며 그의 집 문 앞은 항상 저잣거리처럼 붐볐다. (황현 지음, 역주 매천야록 하, p 28-29)
고종은 민왕후가 살아 있을 때 미신에 빠졌다. 민왕후가 1882년 임오군란 때 충주에서 만난 무당 진령군에 의존했고 1884년 갑신정변도 진령군이 북묘에 모신 관우 때문에 잘 넘겼다고 믿었다. 이러자 진령군은 비선실세로서 국정을 농단했다.
그런데 고종황제는 민왕후가 죽고 나서도 미신에 의존하여 성강호를 차관까지 시켰으니 참으로 안타깝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