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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곤칼럼>명성황후에 대한 평가 (1)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1897년 11월 국장(國葬)으로 홍릉(洪陵)에 안장하고 명성황후(明成皇后)라 칭함.
등록날짜 [ 2020년12월21일 13시09분 ]

조선 제26대 왕 고종(1852~1919 재위:1863~1907) 시대에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은 흥선대원군 이하응과 (1820∽1898)과 명성황후 민자영(1851∽1895)이다. 이 시기는 대원군과 명성황후의 갈등이 드라마틱하게 부각되었고, 고종은 존재감이 별로 없었다.

명성황후는 뮤지컬과 영화, 드라마, 조수미의 노래로 널리 알려졌고,  ‘나는 조선의 국모다.’로 대중들에게 각인되어 있다. 과연 그러한가? 그녀에 대한 당대의 평가는 어떤가?

당대 평가에 앞서 명성황후가 누구인지부터 알아보자. 그녀는 1851년에 경기도 여주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여흥민씨 민치록인데, 민치록은 숙종 때 왕비인 인현왕후의 아버지 민유중의 5대손으로 노론 집안이었다. 그런데 민치록이 그녀가 8세 때 사망하여, 그녀는 홀어머니와 함께 7년간 서울 감고당에서 지냈다. (부모를 여위었다고 한 자료는 사실이 아니다.)

1866년에 그녀는 흥선대원군의 부인 부대부인(府大夫人) 민씨의 추천으로 고종 비에 간택되었다. 부대부인과 그녀는 여흥민씨로 친척이었고, 부대부인의 동생 민승호는 민치록의 제사를 지내는 양자였다.  

1873년에 대원군이 10년간의 권좌에서 물러나고 고종이 친정(親政)을 하게 되자 민씨 척족들이 권력을 잡으면서 대원군과 대립이 심화되었다. 외척정치를 없애고자 민왕후를 선택한 대원군의 크나큰 오판이었다.

1882년에 선혜청 관리들이 구식 군인들에게 13개월 밀린 봉급 중 1개월분만 지급하는 쌀마저 모래와 겨를 섞어 지급하자 임오군란(壬午軍亂)이 일어났다. 선혜청 당상 민겸호는 살해당하고 민왕후도 충주 장호원(長湖院)으로 피신하였다.


왕비가 사라지자 흥선대원군은 국상(國喪)을 선포하였다. 이때 왕비는 청나라에 지원을 요청하였고, 대원군은 청으로 압송되었으며, 민씨 정권이 다시 권력을 잡았다. 

그런데 1894년 4월에 동학농민군이 전주를 점령하자 민왕후는 다시 청나라를 끌어들였고 일본군도 조선에 들어오면서 청일전쟁이 일어났다. 1895년에 일본이 청일전쟁에서 승리하여 요동반도를 차지하자 러시아가 주도한 삼국간섭이 일어났다.


이러자 일본은 배상금을 받고 요동반도를 포기하였다. 이에 영악한 민왕후는 러시아에 접근하여 일본 세력을 추방하려고 하였다. 1895년 8월 20일(양력 10월 8일) 일본 낭인들이 궁중에 서 민왕후를 살해하는 을미사변이 발발했다.


그녀는 이틀 후에 폐위되어 서인(庶人)으로 강등되었다가 10월에 복호(復號)되었고, 1897년 11월에 대한제국 국장(國葬)으로 청량리 밖 홍릉(洪陵)에 안장되었는데 명성황후(明成皇后)라 칭했다.

명성황후는 고종과의 사이에 4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 하나만 살아서 나중에 순종이 되었다. 종교는 무속신앙으로 되어 있는데, 몸이 약한 아이들을 보살피다 보니까 굿과 점에 심취했다.

민왕후가 무속에 심취한 사항은 1895년 1월에 고종 부부를 네 번이나 만났던 영국의 지리학자인 여행작가 비숍(1831∽1904) 여사의 첫 만남에 나와 있다.

“왕비로부터 사사로운 초대를 받았던 일은 참으로 기쁜 일이 아닐 수 없다. 선교사이자 미국인 의사이며 왕비의 주치의인 언더우드 여사(1851∽1921)와 동행한 자리였다. ... 알현실의 상단에는 왕과 세자 그리고 왕비가 심홍색 벨벳으로 장식된 의자 앞에 서있었다. 언더우드 여사가 나를 소개하자 그들은 우리에게 마련된 의자에 앉으라고 권했다.


왕비 마마는 40세가 넘었으며 매우 멋있어 보이는 마른 체형이었다. 얼굴빛은 상당히 창백했는데 그 창백함은 진한 진주빛 분을 발라 더욱 희게 보였다. 눈은 냉철하고 예리했으며 반짝이는 지성미를 풍기고 있었다. ...  외아들이며 어머니의 우상인 세자(나중에 순종)는 비만하고 의지가 박약해 보였다. 세자는 완전히 병약한 환자같은 인상을 풍기고 있었으며 나 역시 그렇게 느꼈다.


왕비는 아들의 건강에 대해 노심초사했으며 후궁의 아들에게 왕위를 뺏길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묻혀 살았다. 그는 이런 원인을 해소하기 위해 무절제한 행동을 하기도 했다. 그는 끊임없이 미신의 힘을 빌려 자신의 소원을 기원하고 안정을 찾으려 했으며 스님에게 바치는 시주도 적지 않았다.


내가 그들을 알현하는 동안 왕비와 세자는 서로 손을 꼭 잡고 있었다. (비숍 지음·신복룡 역주,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 집문당, 2015, p 259-2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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