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황후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을 달린다. 유길준이나 황현 같은 조선 사람은 악평을 하였고 외국인들은 한결같이 호평이었다. <서유견문>을 지은 개화 사상가 유길준(1856-1914)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 왕비는 세계 역사상 가장 나쁜 왕비입니다. 마리 앙투아네트보다 더 나쁩니다.” <매천야록>을 지은 황현(1855-1910)은 왕후가 민씨척족 정치를 하고 국고를 탕진하고 부패했다고 비판했다.
한편 1888년 3월에 조선에 오자마자 왕후의 주치의가 된 미국인 언더우드 부인(1851∽1921)은 <언더우드 부인의 조선견문록(1908년 발간)>에서 이렇게 적었다.
“나는 왕비에게 깊은 흥미를 느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좀 창백하고 아주 바싹 마른 얼굴에 이목구비가 어쩐지 날카로운 느낌을 주며 사람을 꿰뚫어 보는 것 같은 총명한 눈을 지닌 그는 첫눈에 아름답다는 인상은 주지 않았다.
그러나 그 얼굴에서 힘과 지성 그리고 강한 개성을 가지고 있음을 읽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보니까 그 생기발랄함과 소박함, 재치 같은 것들이 그의 용모를 환히 비추었고, 단순한 겉모습의 아름다움 보다 훨씬 더 큰 매력을 느끼게 해 주었다. 그가 아주 아름답게 보이는 순간에 비로소 그가 진정한 조선의 왕비임을 깨닫게 되었다.
나는 그가 정신 수준이 매우 높은 사람임을 곧 알아차렸다. 그리고 다른 모든 아시아인과 마찬가지로 그의 지식은 대개 중국의 고전에서 얻은 것들이지만, 그는 세계의 여러 강대국들과 그 정부에 대해 썩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질문을 많이 했고 자기가 들은 것은 모두 기억했다.
그는 숨어있는 유능한 외교관이었고 자기에게 몹시 반대하는 사람들의 허술한 데를 찌르기 일쑤였다.”(언더우드 지음 · 김철 옮김, 언더우드 부인의 조선 견문록, 이숲, 2008, p 44-45)
하기야 언더우드 부인은 1889년 3월 14일에 서울에서 결혼했는데, 이때 100만 냥의 왕비 축의금이 조랑말에 실려 왔다. 축의금 100만냥은 ‘아라비안 나이트’ 얘기와 같았다. 당시에 2500 내지 3천 냥이면 부유한 축에 속했기 때문에 그 거액은 조선의 왕비도 쉽게 줄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선교단도 쉽게 처분할 수 없는 돈이었다. (이종각 지음, 미야모토 소위,명성황후를 찌르다, 메디치미디어, 2015, p 231)
요즘으로 말하면 500억 원을 축의금으로 받았으니 나쁜 말을 할 수 없었으리라. (kbs 역사저널 그날 제작팀, 역사저널 그날 8 순조에서 순종까지, 민음사, 2017, p 98)
영국의 지리학자 비숍 여사의 평가도 눈여겨 볼만하다.
그녀는 1894년 1월부터 1897년 3월 사이에 조선을 네 차례 방문하여 1897년에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을 발간했는데 1895년 1월에 왕비의 초대를 네 번이나 받았다.
“왕비로부터 사사로운 초대를 받았던 일은 참으로 기쁜 일이 아닐 수 없다. 선교사이자 미국인 의사이며 왕비의 주치의인 언더우드 여사와 동행한 자리였다. 이들은 이곳에서 서구식 스타일로 차려진 만찬을 즐긴 후에 알현실로 들어갔다.
왕비 마마는 40세가 넘었으며 매우 멋있어 보이는 마른 체형이었다. 얼굴빛은 상당히 창백했는데 그 창백함은 진한 진주빛 분을 발라 더욱 희게 보였다. 눈은 냉철하고 예리했으며 반짝이는 지성미를 풍기고 있었다. ”(비숍 지음·신복룡 역주,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 집문당, 2015, p 257-259)
“내가 떠날 때 왕과 왕비는 일어나 배웅을 해주었으며 나는 왕비와 악수를 나누었다. 그들은 모두 내가 조선에 다시 돌아와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고 친절하고 다정스럽게 이야기했다. 내가 9개월 뒤에 조선에 돌아왔을 때 왕비는 이미 무참하게 살해당했고 왕은 궁전에 갇혀 죄수와 다름없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위 책, p 266-269)
한편 비숍은 을미사변을 기록하면서 명성황후를 이렇게 평가했다.
“44세 나이의 왕비는 한 우방국 공사의 피비린내 나는 음모에 자극을 받은 자객들의 손에 그렇게 죽어갔다. 그녀는 영리하고 야망이 있으며 음모적이고 매력있고 아름다웠던 왕비였다. ”(위 책 p 287).
또한 왕후 시해에 관련된 일본공사 이노우에와 미우라 고로도 명성황후를 평가했다.
“그녀는 아주 미인이라고 할 정도는 아니었으나 가는 얼굴에 마른 형의 얼굴로 눈에 약간 매서운 기운이 있는 총명해 보이는 부인이었다. 특히 그녀는 목소리가 아름답고 이야기를 잘하는 편이며, 조선 부인으로서는 아주 표정이 풍부한 편이었다. 그 우아한 자세 안에 무한한 권모술수를 숨기고 소위 암탉이 새벽에 우는 일을 맡았다는 말처럼 아내가 남편의 할 일을 가로막아 자기 마음대로 해 동아의 대국을 그르치려 하고 있었던 것이다.”
명성황후를 여우 사냥한 미우라 고로 공사의 평가도 후하다. “왕비는 여성으로선 실로 보기 드물게 재능을 갖춘 호걸이었다.” (이종각 지음, 위 책, p 240-24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