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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곤칼럼>을사늑약 톺아보기 (3)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이완용의 찬성으로 대세가 기울어지다.
등록날짜 [ 2021년03월03일 12시51분 ]

1905년 11월 17일 오후 8시에 이토 히로부미는 수옥헌(지금의 중명전)에서 회의를 주재하면서 여덟 대신에게 일일이 가부(可否)를 물었다. 먼저 참정대신 한규설과 탁지부 대신 민영기는 반대였다. 외부대신 박제순과 법부대신 이하영이 어정쩡한 발언을 하자 이토는 찬성으로 정리했다.

이어서 이토는 학부대신 이완용에게 물었다. 이완용은 어전회의에서 자신이 한 발언을 대강 설명한 다음에 말을 보탰다. “이번 일본의 요구는 대세 상 부득이한 것이다. 종전의 우리 외교의 변화가 심했던 탓으로 일본은 두 차례나 큰 전쟁을 치렀다. 일본은 더 이상 동양 평화를 위태롭게 할 수 없어 이번 요구를 제기한 것이다. 일본은 이번에는 반드시 목적을 관철하려고 할 것이다.  국력이 약한 우리가 일본의 요구를 거절 할 수 없을진대 원만히 타협하여  일본의 제의를 수용하고 우리의 요구도 제기하여 관철하는 것이 좋다. 자구(字句) 등은 다소 수정할 여지가 있는 것 같다.”

이완용은 대신들이 반대하자고 어전회의에서 결의한 사항을 한순간에 뒤집어 버렸다. 대세, 국력 운운하며 찬성으로 돌아선 것이다. 이완용의 말이 끝나자 이토는 벌떡 일어나면서 “조약 중에 고칠 만한 곳은 고치면 되니, 과연 당신은 완전 찬성이요.”라고 크게 만족했다.     

이어서 권중현, 이근택, 이지용이 차례로 대체로 학부대신과 같은 뜻이었다고 답변했다. 이토는 이들에게 모두 찬성 판정을 내렸다. (윤덕한 지음, 이완용 평전, 도서출판 길, 2012, p 219 )

한편 박은식은 『한국통사(韓國痛史)』에서 “이완용은 개정하면 찬성하겠다고 했다. 이근택 · 이지용 · 권중현 등은 이완용과 같은 의견으로 ‘황실 존엄’이란 문구를 추가하자고 요구했다.”고 기록했다. 정교도『대한계년사』에서 이렇게 적었다. 
 

“이완용은 “만약 위 조항의 자구(字句)를 조금만 고친다면 인준하겠다”했다. 이토 히로부미가 벌떡 일어나 앉으며 붓을 쥐고 소리쳐 말하기를 “학부대신의 말이 대단히 옳고 타당합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고치겠습니다”하고, 제 뜻대로 두 세 곳을 약간의 문자로 지워 고치고 이어서 가부를 물었다. 이완용과 박제순·이근택·이지용·권중현은 일제히 모두 가(可)자를 썼다.”

이렇게 조약 체결은 이완용을 기점으로 3명의 대신이 모두 찬성으로 돌아서 대세가 확 바뀌었다. 그러면 여기에서 ‘만고의 매국노’ 이완용(1858∽1926)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자.

이완용은 1858년에 경기도 광주군에서 출생하여 1867년에 당시 예방승지였던 이호준의 양자로 들어갔다. 그는 1882년 10월에 증광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1886년 3월 규장각 대교를 거쳐 9월에 정부가 세운 관립 영어교육기관 ‘육영공원’에 입학했다. 당시 영어교사는 ‘파란 눈의 애국자’ 호머 헐버트였다. 

1887년 7월 20일에 이완용은 초대 미국주재 공사관 참찬관에 임명되었다. 그는 초대 주미공사 박정양, 서기관 이하영과 이상재 그리고 번역관 이채연, 민영익을 살린 미국인 의료선교사 알렌과 함께 1888년 양력 1월 9일에 미국 워싱턴에 도착했다.


그런데 이완용은 1898년 5월에 병으로 잠시 귀국했다가 10월에 다시 미국에 가서 1890년 10월까지 주미 대리공사로 2년간 근무하였다. 이후 그는 1892년 9월에 이조참판, 1893년 8월에 공조참판을 하다가 8월에 모친상을 당해 관직에서 물러났다. 1894년 11월에 그는 외부협판을 하고 1895년 5월에 학부대신을 하였다.

1895년 8월 20일에 민왕후가 일본인에게 시해되었다. 친미파인 이완용은 이날 학부대신에서 면직당하고 미국 공사관에 피신하였다. 알렌의 도움을 받은 것이다.1896년 2월 11일에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였다. 아관파천이었다. 이 날 이완용은 외부대신 겸 학부대신 서리, 농상공부대신 서리에 임명되었다. 그는 친러파인 이범진과 함께 고종의 실세였다.

외부대신 이완용은 1896년 7월 2일 독립협회 창립총회에서 초대 위원장으로 선출되었고, 1897년 12월에 비서원경에 임명되었으며 1898년 2월 27일에는 독립협회 회장으로 선출되었으며 3월 10일에 만민공동회를 서재필과 함께 기획했다. 

이러자 고종은 만민공동회 개최 다음날인 3월 11일에 이완용을 전라북도 관찰사로 임명하였고, 7월 17일에 그는 독립협회에서 제명당했다. 한편 그는 1900년 7월에 공금 유용 혐의로 전라북도 관찰사에서 면직 당했다가 1901년 2월에 궁내부 특진관에 임명되었다. 

 
1901년 4월 14일에 양아버지 이호준의 상을 당하여 이완용은 3년 7개월 동안 벼슬에서 물러났다가 1904년 11월 9일에 궁내부 특진관에 임명되었다.   (윤덕한 지음, 이완용 평전 참고 )

을사늑약 체결 2개월 전인 1905년 9월 18일에 이완용은 학부대신에 임명되었다. “평안남도 관찰사 박제순을 외부대신에, 육군부장 이지용을 내부대신에, 정2품 이완용을 학부대신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勅任官) 1등에 서임(敍任)하였다.”(고종실록 1905년 9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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