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09월18일sat
 
티커뉴스
OFF
뉴스홈 > 사설ㆍ칼럼 > 강대의칼럼
kakao 트위터로 보내기 싸이월드 공감 네이버 밴드 공유
쪽지신고하기 기사글확대 기사글축소 기사스크랩 이메일문의 프린트하기

<강대의 칼럼> 수은 강항의 역사적 현장을 직시(直視)해 보다!

영광군과 고창군, 고창문화원, 지역 향토학자 그리고 각 지역 향교와 지명터 탐방!!
등록날짜 [ 2021년07월07일 19시58분 ]

2015년 4월 2일 수은강항선생기념사업회(회장 박석무)의 창립총회 및 학술워크숍의 참여자 열기는 2011년을 끝으로 전남도 문화재지정에 만족(?)하고 손 놓고 있던 현창(顯彰)사업에 불을 지핀 꼴이 됐다.


당시 김 00 영광군의회의장은 군 조례 지정을 창립총회에서 축사를 통해 처음 언급했고 필자는 당시 세미나 사회를 보면서 축사를 마치고 자리에 앉은 의장에게 다그치듯 질문을 던져 조례지정 약속을 받아냈다. 그 이후 수은강항선생의 영광군조례지정은 그야말로 가속도가 붙어 일사천리(一瀉千里)로 진행됐다.


선비의 참 자세는 도가(道家)사상과 정의(正義)로움.

이 지역 호남의 유림(儒林)들이 올곧은 선비정신으로 무장해 구국의 활동으로 가장 낮은 포로 신분으로 혼신의 힘을 다한 애국애족정신의 강항의 발자취에 주목했다.
 

때마침 일본에서는 무라까미 쓰네오 수은강항일본연구회장이 80대 초반에 마지막 열정을 쏟아내며 강항선생에 대한 ‘일본 유교의 전파자’로 ‘유교의 비조’임을 저술(著述)서에 수은선생을 지성(至聖)의 반열에 속함으로 표기(標記)해 가면서 한량(限量)없이 사자후(獅子吼)를 토하고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부분 쪽으로 수은선생에 대한 가치 판단이 편향(偏向)되어 있고 단편적으로만 비춰지고 또는 왜곡되어 조명되고 있는 부분이 홍수처럼 쏟아지는 인터넷상에서는 더 많아 지금까지 다람쥐 쳇바퀴 돌듯 그 자리에서 맴돌고만 있었다.


그러나 진실은 결코 영원히 속일 수 없고 사향(麝香)은 아무리 감싸고 감싸도 그 사향의 향기로움은 멀리서도 알 수밖에 없는게 참된 정의요 진실이다. 이렇듯 국내에서의 현창사업이 아무리 나락(奈落)에 떨어져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있었던 게 펙트(사실)이다.
 

그러나 올곧은 호남의 유림들의 마음속에 깃들어 있는 수은선생에 대한 흠모(欽慕)의 정(情)만은 결코 이대로 메말라 가지 않고 그들의 학문이 커지고 역사적 인식이 다듬어지고 질적 팽창이 커질수록 내부에서는 용광로처럼 더 끓고만 있는 격이 된다.


대표적인 단체가 말년(末年)의 유진오 박사가 이끄는 (사) 동양문헌학회다. 호남유림의 중심축인 회원들은 의식 있는 대표적 이 지역 유림들의 조직단체로 매년 인물과 위인중심으로 학술토론회를 열고 있었다.


이낙연 전, 대표와 무라까미 쓰네오 회장의 인연

회원들은 2014년 학술세미나에 이어 수은선생에 대한 현창사업이 바람직하게 재 진행 되어감에 따라 곳곳에 물심양면으로 협조하면서 매년 참여도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남달랐다.


또, 다른 맥락(脈絡)에서 말하자면 그 당시 전남도정을 책임지고 있는 이낙연 전남지사는 1989년 00신문사 일본 특파원으로 근무했기에 일본을 가장 잘 아는 지일인사로서 수은선생에 대해서도 일본과 각별한 인연을 갖고 있었다.


무라까미 회장까지도 그를 기억하는데 오즈시를 두 차례나 방문했고 수은선생의 탄생지인 영광군이 고향임을 강조했다고 밝혔다. 이후 무라까미 회장은 일본 오즈시에 대한민국 관광객이 방문을 하거나 무라까미 회장이 우리나라를 찾을 때면 빼 놓지 않고 이낙연 민주당 전, 대표에 대한 각별한 인연을 자주 말하며 승승장구(乘勝長驅)해 소원성취(所願成就)하기를 입버릇처럼 기원했다.


2015년 이낙연 전남도지사를 찾은 강지원변호사와 백인철 탈랜트, 방송작가 일행

전남문화재단 토요역사학교와 역사적 탐방

불과 6년전의 일들 중에서도 두서없이 주마등처럼 많은 일들이 스치고 지난다. 그중에 잊지 못할 현창사업의 도화선(導火線)이 된 문화적 사업이 강항토요역사학교이다.


2015년 전남도 보조금사업으로 첫 출발이 되었으며 토요역사학교가 전국적으로 그닥 잘 정돈되어 있지 않은 때였다. 다만 전국의 초등학생들의 주 5일 수업 시초(始初)의 공백을 잘 메꾸기 위해 탄생된 배경도 짙게 깔려 있는 그런 보조금 사업이었다.


그 토요역사학교가 발판이 되어 수은강항선생의 문적(文籍)과 발자취를 따라 그 누구도 찾아 본적이 없는 역사적 문화탐방이 시작되었다. 우선 역사적 사실이 증명되어야 하기에 문중의 족보를 뒤지고 수은선생의 문적인 수은집과 운제록, 잡지 등을 샅샅이 살펴가며 등하불명(燈下不明)을 스스로 벗어나기 위해 먼저 영광군의 역사적 문화탐방을 통해 가장 가까운 지역부터 발굴(發掘)하기로 했다.


수은선생의 탄생지인 불갑면 유봉마을의 흩어져있는 고인돌의 잔해(殘骸)를 보면서 일부 일가의 몰지각함으로 인해 최신(最新)건물 증축에 문화적 한계에 하염없이 쳐다보며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이어 1560년 왜국에서 수은선생이 귀국이후 유봉마을에서 운제마을로 거처(居處)를 옮겨 후학양성을 위해 서당을 지은 삵고개 서당터를 발굴하고자 노력을 했다. 단체명으로 기부를 받아 본격적으로 진행하려 했으나 땅주인의 욕심으로 이내 접는다.


이 뿐 아니라 수은선생이 귀국해 가장 왕성한 활동을 전개한 영광지역 중 불갑 운제마을의 종갓집을 둘러보며 전남도의 종갓집지원을 받고자 노력도 했으나 경제적, 정치적 논리의 부재로 포기하고 만다.


그나마 수은종가의 마지막 종손이 2019년에 타계하면서 한국학 호남진흥원에 90여점의 유물을 위탁 맡기고 총체적인 종손의 역할까지도 맡아달라며 유언(遺言)을 남겨 막중한 책임감을 떨쳐 버리지 못하고 있다.


사실 영광군 불갑면 일대는 유명한 명당터다. 필자가 이미 단편소설로 발표한 적 있는 윤회(輪廻) 명당터로 불갑면 지역은 2019년 당시 영광교육지원청의 김00 교육장이 영광 00신문에 게재한 창작소설을 읽고 필자에게 영광군의 우수성을 입증하듯 언급한 적이 있다.


수은선생이 태어난 곳이 유봉(酉峯)마을이니 수탉의 마을이다. 닭이 가장 좋아하는 속성(屬性)의 미물(微物)인 지네이다. 이 지네가 가장 즐거이 파고드는 게 백호(白虎)의 겨드랑이 살이 고 호랑이가 즐겨 잡아먹는 게 삵이다,


삵의 천적(天敵)이 닭이고 보면 약육강식의 윤회로 각 진영이 적당히만 갖춰져 있으면 충족되는 이 얼마나 놀라운 변화무쌍한 윤회의 물레방아바퀴인가 말이다. 이곳에는 틀림없이 지네능선이 유봉마을 앞에 낮게 능선이 깔려 있으며 지네능선은 백호 산을 바라보고 있으며 여기에 삵고개가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2018년 복호(伏虎)문중에서는 이 백호(白虎) 산자락에 군차원에서 행복마을을 건설한다고 해 한 문중의 맥을 자른다고 전남도와 영광군에 문서를 보내 항의한 적이 있으나 시대의 흐름 앞에서 적당히 타협하고 만적이 있다.


영광지역에서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짚고 가고자한다.
1931년 영광속수여지승람 지도
아무리 생각을 고쳐먹어도 가장 안타까운 건 지금의 영광군청 자리가 선비문화의 진수라 할 수 있는 ‘운금정’이라는 정자를 잊어서는 안 된다.


수은선생이 서해 쪽의 구름이 연못에 몽땅 머금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며 ‘운금정’이라는 정자이름을 짓고 운금정기문을 지었다.


이를 증명하듯 영광읍지에 운금정 재 근민당 전 군수 청사소 수은강항선기 금회청의실(雲錦亭 在 近民堂 前 郡守 聽事所 睡隱 姜沆撰記 今會聽議室)로 적고 있다. 당시 기계 유후(杞溪 兪侯)군수가 업무를 보는 청사 근민당(近民堂) 앞에 운금정이 있었는 것으로 보인다.


1617년 당시에 3년 간 흉년이 들자 도탄에 빠진 지역민들을 위해 자기의 녹봉(祿俸)을 내놓았다. 이에 뜻있는 사람들이 앞 다투어 영광을 찾는 외부인을 영접하는 별관(別館)으로 당시의 군수로 재임하던 팔송으로 유명한 윤증(曾)이 지었다는 정자가 운금정(雲錦亭)이다.
 

여러 가지 기능 중에 선비들이 시와 문장을 나눴던 정자로, 군수가 집무를 수행한 장소 바로 앞에 있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지금은 아예 손도 못 대고 표지석 하나 못 세우고 수면 밑으로 방치하고 있음이 향토의 문화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언제나 공허감이 클 뿐이다.


그나마 이 지역 기관단체장들이 수은선생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80년대에 세운 불갑면의 맹자정과 염산면의 섭란사적비를 보며 문화의 현대화의 폐해를 생각하기도 한다.


인근 지역의 수은선생의 역사적 유물

1570년경에는 영광지역을 순회하는 것보다 더 가까운 코스가 육로(陸路)보다 해로(海路)를 이용하는 것이었다. 그 당시 어린 수은이 부친의 소개로 자주 찾은 곳이 영광과 이웃한 무장현이다.


서해길로 도착해 한 때 수학(修學)한 곳이 무장현에서도 대표적인 곳이 구암마을과 칠암마을 포구마을이었다. 무장현의 칠암마을의 강목촌은 중국(中國)고서(古書) 통감강목(通鑑綱目)을 8세에 한밤중에 모두 통달(通達)했다고 해 붙여진 마을이름이다.


이 강목(綱目)촌이라는 지명이 기이하게도 고창군지에 망목(網目)촌으로 남아있으니 이곳저곳 고창군과 고창문화원, 지역 향토학자 그리고 공음면과 무장면 지역 향교와 지명터까지 샅샅이 뒤지고 다닌 한사람으로서 자괴(自愧)감 마져 들었다.


이렇듯 토요역사학교를 통해 역사탐방을 시작한 운영자의 입장에서는 직손인 강지원 변호사와 함께 지금은 고창군 공음면으칠암마을로 다시 변해 버린 강목촌 현장에서 가슴이 미어지듯 허탈해 하고 만 기억이 지금도 새롭다.


앞으로도 호남지역의 수은강항의 역사탐방지에 대한 국내발굴과 선생의 역사적 진실이 녹아 있는 역사적 장소가 호남지역에 너무나도 많아 또 다시 2015년을 현암 이을호박사의 수은강항선생기념사업회가 박석무 호의 재 출발점에서 강조해야만 하는 해가 되고 만다.
<다음호에 계속 이어집니다.>


<편집자 주>

운금정의 기문(운금정기)

萬曆 41년인 계축(癸丑 : 1613, 광해군 5년)년에 기계 유후(杞溪 兪侯)가 영광군에 수령으로 나아갔는데 이듬해에 폭풍의 피해가 있었고 그 다음해에는 봄, 여름, 가을이 가뭄이 들었고 또 그 이듬해에는 서리가 빨리 내려 곡식을 죽였다.


그러나 兪 侯는 자고 먹는 것을 폐하고 봉록을 털어가면 鹽茦을 신중히 하고 여러방면으로 구하니 끝내 한사람도 희생자가 없었다. 그리고 다음해에는 가을 농사가 대풍년이 되니 늙은이들이 侯의 덕을 노래했다.


侯가 아전과 백성에게 말하기를[백성들이 조금 편안해졌으니 나의 할 일은 끝났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氣가 번거로우면 생각이 어지럽고 시야가 막혀있으면 뜻도 막힌다고 했다.


그래서 裨諶 裨諶 : ?도 들(野)에서 꾀하면 제대로 방편을 얻어냈다는 것이니 고을에 휴식하는 집이 없어서는 안된다는 것이 이 때문인 것이다.


하물며 조정에서 명령을 가진 사자가 이따금 줄줄이 오는데 客舘이 가끔 수용할 수 없을 때가 있으니 別舍를 더욱 짓지 않을 수 없다]하고 성루 아래문의 안에 蓮塘의 북쪽을 살펴보았더니 생수가 스며나오고 촉촉하여 뭇 짐승들이 마시거늘 [이곳이 반드시 이상함이 있다]하고 썩은 흙을 지내게하고 가리고있던 풀나무들을 베어 내고 물을 돌려 넣어 네모난 연못을 만드니 수십 畝가 될만하다.


두 연못의 가운데에다 遊亭 수 칸을 세웠는데 한달이 넘지 않아서 공사가 끝을 맺었다. 추위를 대비하여 따뜻한 방이 있고 더위를 대비하여 서늘한 마루가 있으며, 앞에는 거닐만한 섬돌이 있고 뒤에는 드리운 처마가 있어 남쪽으로 가나 북쪽으로 가나 돌아보나 넘겨다보나 붉은 연꽃과 푸른 연잎이 서로 비추고 있어 손님들이 놀러와 보면 마치 蜀錦의 가게에나 水仙의 宮에 든 것 같고 이서와 병졸(?卒)들이 지나면 마치 曲水( 曲水 : 당명황의 流?)의 가와 鏡湖 (鏡湖 : 賀監의 天子께 下?
)의 곁을 행하는 것 같다.


달밤에 좋으니 흰 구름이 거울에 가득하고, 아침이나 낮에 좋으니 붉은 구름이 눈에 가득하고, 소낙비 때에 좋으니 갠 하늘에 우박소리가 귀에 가득하고, 서늘한 바람이 불면 좋으니 싱싱한 향기가 코에 가득하고, 술자리를 벌리기도 좋으니 푸른 대통에 마실만하다.


고을안의 늙은이, 어린이 할 것 없이 입을 모아 서로 축하하기를 [우리 고을이 생긴지 몇 천년이 된지 모르고, 수령을 지낸 관인도 몇백명인지 모르며, 수레나 가마며 말탄 이졸(?卒)들이 아침 저녁으로 얼마를 지나다니며 보았는지 모른데도 한번도 돌아보지도 않던 곳을 하루아침에 얻어서 더럽던 빈 터가 바뀌어 맑은 못이 되고, 市門이 바뀌어 堂宇가 되었으니 사람의 마음과 눈이 서로 틀리기가 이렇게 동떨어진다는 것을 몰랐다.


그런데 侯가 가는 곳마다 꼭 연꽃으로 뜨락에 심은 것은 아마도 侯가 政事에 통해 민첩하기를 연꽃의 가운데는 통하고 밖으로 강직한 성격같이 하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마음을 안정하고 너무 즐거워하거나 시끄러운 음악이 생기지 않기를 蓮의 연출지지 않고 가지 뻗지 않은 것처럼 하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기름진 것들의 속에 있으면서도 자신이 젖어들지 않기를 蓮이 더러운 진흙에 있으면서도 물들지 않듯 하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임기가 다되가는건데 다섯필 말이 끄는 수레를 타고 돌아가게 되면 청백리(琴鶴)의 맑은 풍습이 오래도록 끊이지 않기를 연의 향기가 멀어 갈수록 더욱 맑듯이 하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며 말이 끝나기도 전에 侯가 손을 들어 말리며 [나의 정사가 어떻게 선생의 말에 미치겠오. 다만 色相만은 내 또한 사양할 수 없오]
하고 곧 雲錦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나는 侯에게 백성의 도리로써 원님을 섬기는 터인데 이따금 만나면 손님처럼 대우를 해준다. 이에 그 일을 기록하며 정자의 벽에 두어 무령(武靈 : 영광의 옛 이름)의 고사를 삼는 바이다.

올려 0 내려 0
강대의 이 기자의 다른뉴스보기
무통장입금 정보입력 입금자명 입금예정일자
(입금하실 입금자명 + 입금예정일자를 입력하세요)
[관련뉴스]
<강대의 칼럼> 수은 강항의 역사적 현장을 직시(直視)해 보다!(광양편)
<강대의 칼럼> 강항은 결코 한 집안의 위인(偉人)이 아니다!!
트위터로 보내기 싸이월드 공감 네이버 밴드 공유
기사글확대 기사글축소 기사스크랩 이메일문의 프린트하기
<강대의 칼럼> 수은 강항의 역사적 현장을 직시(直視)해 보다!(광양편) (2021-07-11 18:19:18)
<강대의 칼럼> 강항은 결코 한 집안의 위인(偉人)이 아니다!! (2021-06-23 13:04:38)
윤영덕, '국민의 평범한 일상 ...
영광군, 모시떡 상품 다양화 및...
목포 출신 도의원, ‘전남도 유...
광주 북구, 청년공방 연계 ‘청...
유네스크 생물권보전지역으로 ...
광주, 전남북서 이낙연 지지 선...
광주시, 2·3급 공무원 승진·...
현재접속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