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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대의 칼럼> 수은 강항의 역사적 현장을 직시(直視)해 보다!(광주 동구 무광사안의 칠의사 편)

광주의 칠의사와 한 학교법인 이사장의 끈질긴 호남의병장들에 대한 애국애족정신의 휴머니즘적인 교육관
등록날짜 [ 2021년08월14일 17시32분 ]

현대 역사에서 수은 강항선생을 호남(7인)의 인물에서 빼놓지 않고 충무공 이순신장군과 함께 배향하는 곳이 있어 광주로 올라오면서 아주 반갑게 이곳을 소개한다.


수은선생이 영광 논잠포구에서 피로(被擄)되게 된 이유 중에 하나가 통제사에게 들어 가 왜군과 전쟁을 계속하려고 한 기록을 보면 그 의미를 더 쉽게 발견해 낼 수 있다.

1592년 당시 왜적에 의해 영광은 온통 불바다로 변해 있었고 때마침 우수영에서 올라온 종형 협(浹)(통제사 이순신의 선전관)과 가족회의에서 의논 후 통제사 이순신 휘하에 들어가기 위해 베로 남행을 시도하다가 도중에 가족 모두가 왜적의 포로가 되었노라고 이미 앞에서 밝힌 바 있다.


이러한 이유를 어떻게 알았는지 광주 ‘칠의사’에 수은선생이 충무공과 함께 배향(配享)되어 있다.


먼저 ‘칠의사’라 네이버에서 검색해 보면 ‘네이버 지식백과’에서 구례 석주관 칠의사(조선 선조 31년(1598) 정유재란 때 진주에서 올라온 왜군이 천혜의 곡창지대인 전라도 일대를 점령하기 위해 석주관으로 쳐들어오자 구례 출신의 선비인 왕득인은 의병을 모집하여 싸우다 전사하였다.


왜군이 구례까지 들어와 방화와 약탈을 자행하자 이정익·한호성·양응록·고정철·오종·왕의성(왕득인과는 부자지간) 등은 수백 명의 의병을 모집하여 석주관을 지키던 중 왜군과 맞서 싸우다 순절하였으며, 그들 중 왕의성만이 살아남아 그 뒤 병자호란 때 또다시 의병을 일으켰다.


순조 4년(1804) 나라에서는 이들 일곱 의사의 충절을 기려 각각 관직을 높여주었으며, 고종 5년(1868)에 칠의단(七義壇)을 건립하였다. 당시 석주관성을 지키기 위한 섬진강변 사람들의 피어린 전투는 지금까지도 구례사람들에게는 전설처럼 전해오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석주관 칠의사묘 (답사여행의 길잡이 6 – 지리산 자락, 초판 1996., 16쇄 2009., 한국문화유산답사회, 김효형, 박종분, 김성철, 유홍준, 정용기)
만 검색된다.


역사의 한켠에서는 숫자로 인물을 묶어 표기하는게 의례(儀禮)화되어 있는 듯 하다. 사육신과 생육신이 그러하고 밝히고자 하는 칠의사(七義士)와 같이 오의사(五義士)와 구의사(九義士) 등으로 조선시대 임진왜란에서 병자호란까지 올라오면서 구국의 의사(義士)들을 그러한 방식으로 기리고 있어서 주목해 본다.


무광사 안내판의 수은 강항(睡隱 姜杭)을 수은 강항(睡隱 姜沆)으로 정정

춘담(春潭) 최병채 선생과 칠의사 탄생 배경

칠의사(七義士)는 조선대학교 후문 쪽으로 올라가 한 고등학교 기숙사를 거쳐 돌고 돌아 들어가면 깊숙이 무광사안에 자리 잡고 있다.


이번에는 인터넷으로 무광사를 검색해 칠의사에 들어가면 생뚱맞게 전남여자상업고등학교(전신 춘태여상)와 연관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인터넷 자료를 조금 읽어 보면 1957년 9월 23일 : 무광사 건립, 설립자 최병채 선생 1960년 4월 28일 : 광주 춘태여자상업 고등학원 개교, 초대 교장 최병채 선생 취임 1966년 11월 19일 : 학교법인 춘태학원 설립 인가, 1967년 10월 5일 : 광주춘태여자종합고등학교 설립인가 1968년 3월 1일 : 광주춘태여자고등학교 개교 1972년 2월 10일...출처 위키백과)

이와 별도로 최병채 이사장은 11년 전인 1957년 문과 중심의 국제고등학교를 창립하게 되는데 그 해 무광사도 설립하게 된다. 그런 이유로 광주에 자리 잡고 있는 국제고등학교는 해마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춘향제와 추향제를 임직원들이 학생들과 함께 봉행(奉行)한다.


아마도 춘담(春潭) 최병채 선생의 유지(遺志)를 살려 충무공의 5대 정신인 애국애족(愛國愛族), 자주자립(自主自立), 창의창조(創意創造), 염결무사(廉潔無私), 감전필승(敢戰必勝)을 참배하는 학생들의 마음속에 심어 줘 인생관 정립에 도움을 주고자 최선을 다한다고 봐야겠다.

춘담(春潭) 최병채 선생 칠의사 건립

선생은 광주 학동(조선대학교 후문 쪽)에 충무공 이순신 장군을 기리는 사당인 무광사를 세우면서 그가 추구했던 민족정신을 구현하고 따뜻한 사회를 구현하고자 했다.


무광사는 춘담(春潭)이 51세 되던 1957년 9월 23일 노산 이은상 박사의 자문을 얻어 조선대학교 부속병원 언덕에 건립했으며 이는 충무공 이순신장군의 구국 정신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무광사 ‘칠의사’ 사당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무광사안 사당은 칠의사이며 이 ‘칠의사’에는 이순신 장군을 주벽으로 수은 강항선생, 문열공 김천일 의병장, 충장공 김덕령 장군, 충장공 정 운 장군, 금계 노 인 선생, 수사 송희립선생을 모시고 있으며 충무공 탄신일인 4월 28일 춘향제, 기일(忌日)인 12월 16일에는 추향제를 모시고 있다.


무광사는 1966년 광주공설운동장이 준공되고 전국체육대회가 개최되었을 때 성화의 점화처가 되기도 했다.


전국적으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을 기리는 사당은 21개에 달하지만 이곳 무광사 만큼은 독지가(篤志家) 한 사람이 충무공과 전혀 관련이 없는 곳에 사재(私財)를 동원해 민족정신을 길러내기 위해 건립한 아주 상징성이 강한 곳이라 말할 수 있다.

 

춘담(春潭) 최병채 선생 약력

춘담(春潭) 최병채 선생은 1907년 순천시 주암면 운룡리에서 부친 최경환(炅奐)씨와 김해 김씨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났다. 조선 중엽 중종대에 의정부 사인(舍人)을 지낸 최산두의 16대 손이다.


15세부터 순천의 조정림에게 한의학을 배우고 화순 동복의 이진규에게 침구학(鍼灸學)을 배운 후 22세 되던 1928년 한약업사 면허증과 침구사 자격증을 취득하였다. 이후 부족한 공부를 위해 일본 오사카 하마대라 침구학교에 유학했다.


43세 되던 1949년, 광주광역시 양림동에 인과원(因果院)을 개업한 후 한의사이자 교육자, 사회사업가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고 38년간 침과 뜸의 명의로 그의 명성이 알려졌으며 1987년 6월 12일 81세로 타계했다.


춘담(春潭)은 생전에 침구술로 유명했지만, 그를 더욱 유명하게 한 것은 가난한 환자에게는 무료로 치료해주고 약값을 받지 않는 등의 사랑의 의술뿐만 아니라 궁핍한 사람을 구해주고 거지들을 도와주며 교육을 위해 많은 학교를 세웠으며 사회사업에 헌신한 그의 삶 때문이다.


춘담(春潭)은 1947년 20리를 걸어 다녀야 했던 고향 어린이들을 위해 승주 운룡초등학교를 설립하는 것을 시작으로, 1960년 춘태여자고등공민학교와 1965년 화순 이서에 신농업기술학교를 세우고, 1977년에 산업체 특별 학급을 설립하였다. 춘태여자고등공민학교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학교였다.


장학금 혜택이 많았고, 학비가 매우 저렴했으며, 화순 담양 등 타 지역 학생들에게는 무료로 기숙사를 제공했다. ​화순 이서에 설립한 농업기술학교는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시골의 불우한 소년들이 농업기술을 배우는 터전이었다.


1966년에는 광주시 학동에 춘태여자중학교를 설립했다. 1967년에는 화순에 신농중학교와 광주 학동에 전남여자상업고등학교를 연 이어 설립한다. ​이렇듯 많은 학교를 설립했으면서도 춘담(春潭)은 돈이 없어 공부 못하는 수많은 학생을 위해 장학금을 지급했다.


1989년 국제고등학교가 캐나다의 라살대학과 MOU를 체결하고 13명의 유학생을 보냈다. 이러한 국제교류가 가능했던 것은, 춘담(春潭)의 장학금으로 공부를 마치고 성공한 케이스로 캐나다 몬트리올 시립 식물원에 근무했던 양재홍 씨가 적극적으로 나서 도움이 되었기에 가능했다.


​이 뿐 아니라 춘담(春潭)의 장학금을 받았던 스위스 대사와 유엔대사를 지낸 박원화도, 노동부장관과 국회의원을 지낸 이상수 변호사도 국제고등학교를 찾아 특강을 통해 학생들에게 큰 꿈을 심어주기도 했다.


춘담(春潭) 최병채 선생은 독실한 불교신자였다.

고향인 승주 운룡에 재천사라는 사찰을 세웠으며, 순천 송광사의 대웅전 등이 6.25전쟁으로 불에 탄 채 버려져 있자 대웅전 중수에 앞장서 대웅전, 삼존불과 종고각을 건립했으며 나주 심향사에 삼존불, 6.25전쟁 때 훼손된 광주 증심사 대웅전에도 삼존불을 건립하는데 도움을 줬다.


이렇듯 교육과 사찰 건립 등 많은 일을 하였으면서도 그의 삶은 의외로 검소했다. 이밖에도 춘담(春潭) 최병채 선생은 여학생들을 위하여 부덕과 행실을 닦는 춘태관을 세웠으며 고향 승주 운룡에는 망운각, 영월정, 쌍훤교를, 화순 이서에도 도원암 등 수많은 건물을 세워 주민들의 편익에도 큰 도움을 줬다.

시인(詩人) 춘담(春潭) 최병채
춘담(春潭) 최병채 선생은 한의사이자 교육자였지만 300여 수가 넘는 시를 남긴 시인이기도 했다. 그가 남긴 300여 수의 시는 그의 문집 『운월세고雲月世稿』에 전해지고 있다.


또한 춘담(春潭)은 거액을 희사하여 명의로 이름을 떨친 허준의 사당을 짓고 강당을 건립하기도 했다. 그의 공로를 기리기 위해 1958년에는 춘담 기인 최병채 기적비를 세웠고, 1963년에는 참교육을 실천한 공로로 전라남도 문화상, 1967년 경향신문사 제2회 ‘국민에게 주는 희망의 상’ 1982년에는 국민훈장 석류장을 수여받았다.

[출처] 한의사로 교육자로 봉사했던 기인 춘담 최병채와 무광사|작성자 두암
[참고자료]전남여자상업고등학교/ 국제고등학교 홈페이지


‘칠의사’에 대한 결어(結語)
춘담(春潭) 최병채 선생께서 생전에 많은 학문을 두루 섭렵(涉獵)함이 감히 표현하자면 눈에 보이는 듯 하다. 인류애(人類愛)가 보이고 휴머니즘이 살아 움직이는듯하다. 인물의 중요성이 위의 ‘칠의사’에 배향된 인물과 상통(相通)하고 있다. 이 땅에 오셔서 마음껏 육영사업과 더불어 당신만의 등신불(等身佛)로 세상을 마친 것이다. 역사를 잊어서는 안 되는 이유를 실천하고자 하는 삶으로 적나라하게 표출했다.
여기에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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