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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대의 칼럼> 수은 강항의 역사적 현장을 직시(直視)해 보다!(나주 김천일장군의 정렬사 편)

건재 김천일 의병장의 정렬사와 그 외형을 관리하는 학예사의 상호 문화교류의 부족과 편협적인 역사의식이 문제!
등록날짜 [ 2021년08월07일 10시54분 ]
나주하면 의병의 도시이다. 왜 그럴까?! 그닥 빠른 머리회전으로도 연결이 잘 안 될 수 있다. 그러나 창의사(倡義使) 건재(健齋) 김천일(金千鎰) 의병장(義兵將)을 첫 화제로 말하면 누구나가 ‘아하!’ 하면서 나주시가 왜 의병의 도시로 인정할 수 밖에 없음을 인정하고 만다.



그렇다면 김천일 의병장이 누구인가를 조금 알아보고 가자. 조선 임진왜란 때의 조선 중기의 문신ㆍ의병장(義兵將). 부친은 진사(進士) 언침(彦琛)이다. 




건재(健齋) 김천일(金千鎰) 의병장(義兵將)

자는 사중(士重), 호는 건재(健齋), 시호는 충장(忠壯), 본관은 언양(彦陽)으로 용안현감(龍安縣監)과 강원도ㆍ경상도의 도사를 역임하였고 한 때 좌천되어 임실현감이 되었다가 담양부사ㆍ한성부서윤ㆍ수원부사를 역임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 고경명(高敬命)ㆍ박광옥(朴光玉)ㆍ최경회(崔慶會) 등에게 글을 보내어 창의기병(倡義起兵)할 것을 제의하는 한편, 담양에서 고경명 등과도 협의하였다. 


그 뒤 나주에서 송제민(宋濟民)ㆍ양산숙(梁山璹)ㆍ박환 등과 함께 의병의 기치를 들고 의병 3백 명을 모아 북으로 출병하였다. 이후 수원 행산고성(杏山古城)에 들어갔으며 8월에는 강화(江華)에 주둔한 적을 소탕하고, 양화도(楊花渡)에서 대승을 거뒀다.


이때 강화부사ㆍ전라병사와 협력하여 연안에 방책(防柵)을 쌓고 병선을 수리하여 전투태세를 재정비하였다. 강화도는 당시 조정의 명령을 호남ㆍ호서에 전달할 수 있는 전략상의 요충지이기도 하였다.


9월에는 통천(通川)ㆍ양천(陽川)지구의 의병까지 지휘하게 되고 매일같이 강화연안의 적군을 공격하였으며, 양천ㆍ김포 등지의 왜군을 패주시켰다. 
이듬해인 1593년 정월 명나라 군대가 평양을 수복, 개성으로 진격할 때 이들의 작전을 도왔으며, 명·일간에 강화가 제기되자 반대운동을 전개하였다.


서울이 수복되어 굶주리는 자가 속출하자 선편으로 쌀 1천석을 공급하여 구휼하였다. 전투에 있어서도 경기수사·충청수사와 함께 선유봉(仙遊峯) 및 사현전투(沙峴戰鬪)에서 다수의 적을 참살, 생포하고 2월에는 권율(權慄)의 행주산성전투에 강화도로부터 출진하여 참가하였다.


이들 의병은 강화도를 중심으로 장기간의 전투에서 4백여 명의 적을 참살하는 전공을 세웠다. 이어 진주(晋州) 싸움에 참전하여 10만에 가까운 적의 대군이 6월 21일부터 29일까지 대공세를 감행하자 아군은 중과부적임에도 분전하였으나 끝내 성은 함락되고 말았다.


성이 함락될 무렵 아들 상건(象乾)과 촉석루 아래서 남강에 몸을 던져 순사(殉死)하였다. 
 1603년(선조 36) 좌찬성에 추증되고 1618년(광해군 10)에 영의정이 가증(加贈)되었다. 나주의 정렬사(旌烈祠), 진주의 창렬사(彰烈祠)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열(文烈)공이다.


우리나라의 의병, 호남의 의병

그럼, 의병의 역사는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엊그제 한국학 호남연구원 천 모 원장하고 대화를 하면서도 우리나라 의병의 출발은 5천년 역사 속에서 반도국가의 지형학적 입장에서 유달리 외침이 많았던 것에 기인(基因)해 살펴보면 삼국시대에서 출발한 의병은 고려시대 대몽(對蒙)항전을 거쳐 조선의 강토를 유린하고 특히 호남지역을 쑥대밭으로 만든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 들어서 의병의 역할은 그 절정을 이뤘다고 보는 견해가 대세적이다.


의병의 척박하고 험난한 역사는 임진, 정유재란에 이어 동학에서 그 질곡(桎梏)된 역사를 한 눈에 들여다 볼 수 있다. ‘이런 처절한 역사가 인간세계에서 어떻게 존재했을까’ 하며 치를 떠는 건 그나마 역사의 기록이 남아 있는 1600년경의 전쟁을 수은집을 통해 들여다보고 근세(近世)의 동학혁명을 살펴보면서다.


백성들을 향해 무자비한 만행을 관군이든 왜군이든 그들은 닥치는 대로 만행을 자행했다는 것이다. 1894년(고종 31) 동학농민운동 당시 농민군과 조선, 일본 연합군이 공주 우금치에서 벌인 전투인 우금치 전투가 그 의병사에 하이라이트가 된다..



수은 강항과 건재(健齋) 김천일(金千鎰) 

수은 강항이 지은 건재(健齋)의 제문을 조금만 들여다보면 두 위인(偉人)에 대한 역사성과 우국충정(憂國衷情) 그리고 조선의 선비정신을 엿볼 수 있다. 이는 당연히 우리 세대가 역사적 사실을 밝혀내 후계세대들에게 물러줘야 할 위대한 정신적 문화유산(文化遺産)이다.


<중략>...위대하도다. 선생이시여! 엄연한 단사(端士)였는데 장량(張良)같은 지혜와 용기에 그 모습은 마치 부인(副因)같았으며 황평(黃平 : 唐의 李?)같은 간장에 지킨 바는 철석같았도다.


학문은 도(道)가 있는 분에게 나아갔고 입에는 택할 말이 없었도다. 立脚한 초기에 확연히 흔들리지 않았고 관(冠)끈을 씻고 일어섬에 이르는 곳마다 명성이 있었도다. 의(義)가 있는 바에는 굶주릴 때에 반드시 먹는 것처럼 하였고 목마를 때에 반드시 마시는 것처럼 하였다...


공(公)은 비록 백면(白面)의 서생(書生)이었지만 홀로 빈주먹을 떨치고 나섰다. 충(忠)이 아니면 군(君)이 없고 효(孝)가 아니면 어버이(親)가 없다... <중략>라고 건재의 선비정신을 제문 서두(序頭)에서 이어간다.


 수은 강항이 건재(健齋)에 대한 제문은 선비로서 학문을 갈고 닦고 충효사상에 의한 시대적으로 의병장이 되었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렬사에는 수은 강항의 발자취나 글이 그 어디에도 없다. 역사적 관점에서 바라볼 때 정렬사에 모셔진 김천일의 봉안제문(출처 : 수은집 2권)은 문화유산으로 손색이 없으며 대단히 중요한 선생의 생로병사과정을 모두 다 밝힌 다큐멘터리적인 증언의 글이다.


그런데도 정렬사에는 그러한 수은의 기록이 전혀 남아 있지 않음에 안타깝다. 많은 사람들이 관람 목적과 의병사로 인해서나 후계세대의 인성교육 차원에서 이곳을 방문한다. 그렇다면 수은 강항이 건재 김천일 의병장의 행적에 대해 아주 세세히 평가해 제문을 지은 연유에 대한 설명이 곁들였으면 더 좋겠다.


임진왜란 당시 수은 강항은 영광 수성사에서 의병장으로 활동을 할 때 고경명 의병장에게 군량미를 보낸 기록이 수은집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이런 역사적 자료를 근거로 스토리텔링 식으로 접근을 해도 그 역사는 문적(文籍)에 의한 현장감으로 길이길이 찬란하게 남을 것이다.


그냥 교과서적으로 다루고 오로지 건재(健齋)만을 위한 정렬사가 아니듯 아들 상건(象乾), 양산숙(梁山璹), 임회(林檜), 이용재 등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는 바와 같이 선생의 제문을 지은 기록도 함께 보존하는 게 더 선양(宣揚)사업의 큰 보폭의 움직임이라 생각해 본다.


항상 머물러 있는 방식의 문화재관리에서 벗어나 함께 가야 멀리 가듯 위인들의 현창사업 역시 함께 가야 할 것이다. 정말 답답한 시각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 내 것으로 나만이 독차지 하려함은 주위를 안타깝게 하고 만다. 


특히 2015년에 정렬사와 나주시청을 찾아 여기에 역사적 사실을 설명을 하고나서 2021년 6월에 다시 찾은 정렬사는 여전히 쇄국(鎖國)적인 쇄(鎖) 정렬사 관리방식 그 자체였다. 


나주시의 문화예술을 책임지고 있는 담당 학예사 한 사람만의 잘못된 고집으로 몰아 부치는 생각에는 큰 잘못이라 하지만 학예사의 협의의 시각이 항상 문제를 만든다는 생각에 다다르게 되면 담당자의 중요성에는 결코 변함이 없다.<다음호에 계속됩니다.>


<편집자 주>
아래 글 제문 중에서 3천 한자에도 없는 한자 표기는 미쳐 찾지 못해 (?)로 표기 되었음을 양해 바라며 행여 원문에서 추가 해석이 된 부분은 편집자에게 이메일이나 문자로 보내주시면 더 좋은 글이 되겠습니다. 이에 양해 바랍니다!!



정렬사 전라남도 나주시 대호동에 있는 사당.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임진왜란 때 최초로 의병을 일으킨 김천일(金千鎰, 1537∼1593)과 그의 아들 상건(象乾,1557~1593), 양산숙(梁山璹, 1561~1593), 임회(林檜, 1562~1624), 이용재 등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1606년 (선조 39) 현 나주고등학교 뒤편 월정봉 아래(교
동)에 창건하였으며 1607년 정렬사로 사액되면서 사우를 나주 읍내(현 나주잠사공 장터) 부근으로 옮겼다.


1966년 사우를 남산공원으로 옮겼다가 1984년 현재의 위치에 자리잡았으며 1986년 정렬사비와 건
재동상을 옮겨세웠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 반의 규모로서 팔작지붕이고, 내삼문과 외삼문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 평대문이다. 정렬사비는 시도기념물 제 48호로서 인조 4년(1626년)에 건립되었다..[네이버 지식백과] 정렬사 [旌烈祠] (두산백과)


정렬사 봉안제문(출처 : 수은집 2권)
(旌烈祠 奉安祭文) [창의사(倡義使) 김공(金公) (千鎰, 1537∼1593)의병장의 사우가 나주(羅州)에 있음]


세상에는 더러 깨끗하게 수신을 한 선비로 담백하고 정정(貞靜)함 만 넉넉하여 스스로를 다스리기 잘하나 국가에는 별로 도움을 주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 하면, 더러는 강개한 선비로서 난에 임하여 몸을 잊고 목숨을 바치는 데는 용감했으나 그 평생을 살펴보면 별로 기록할 것이 없는 자도 있다. 이 두 사람은 비록 아름답기는 하지만 오직 한 마디로 칭할만할 뿐이다.


그런데 위대하도다. 선생이시여! 엄연한 단사(端士)였는데 장량(張良)같은 지혜와 용기에 그 모습은 마치 부인(副因)같았으며 황평(黃平 : 唐의 李?)같은 간장에 지킨 바는 철석같았도다. 학문은 도(道)가 있는 분에게 나아갔고 입에는 택할 말이 없었도다. 立脚한 초기에 확연히 흔들리지 않았고 관(冠)끈을 씻고 일어섬에 이르는 곳마다 명성이 있었도다.


의(義)가 있는 바에는 굶주릴 때에 반드시 먹는 것처럼 하였고 목마를 때에 반드시 마시는 것처럼 하였다. 충에는 둘도 없어 나라를 생각할 적에는 집을 잊었고, 공에는 사를 잊었으며, 비록 꺾이기를 만가지로 해도 이험(夷險 : 夷는 平常)에 일치했으니 서락(西洛 : 賢?들)이 비방을 입었을 적에 東賊으 봉화가 전해왔도다. 조정에서 2백년 양병한 것은 바로 완급에 쓰자는 것이었는데 나라의 運營수천리에 어찌 개미하나 성을 지킨 이 없고 팔도가 10여일 만에 土崩의 勢가 되고, 모든 장수들은 머리를 싸매고 쥐처럼 도망쳤단 말인가? 


공(公)은 비록 백면(白面)의 서생(書生)이었지만 홀로 빈주먹을 떨치고 나섰다. 충(忠)이 아니면 군(君)이 없고 효(孝)가 아니면 어버이(親)가 없다. 하여 생은 심히 가볍게 여기고 의는 심히 중하게 여겨 월식을 구하는 활(弓)과 일식을 구하는 화살로 나서서 힘은 부족해도 뜻은 쇠하지 않아 담에 올라 크게 부르짖으며 머리끝이 서고 눈가가 찢어 졌도다. 말에 올라 통곡을 하고 비처럼 탄식을 쏟고 바람처럼 한숨을 쉬었다.


진산(珍山)과 錦山이 이미 적의 소굴이 되자 공은 집을 돌보지 않았고 霽峰과 重蜂이 연하여 몸으로 순절했으나 공은 안색을 바꾸지 않아 孤軍 單卒로 용감하게 곧장 전진하여 江都에 주둔하고 나아가 畿甸을 공격하므로써 上津의 길이 통하게 되었으니 국가에서는 薛景仙 薛景仙 : 당나라 安祿山의 난에 ? 
의 공에 의뢰했고 간도의 書를 올리니 주상께서는 顏眞卿 顏眞卿 : 역시 노산의 난에 상산태수로 의를 지켜 ?의 모습을 물었도다.


行朝의 명령이 비로소 호·기(湖·畿)에 전달되었고 京洛의 인민들이 그제야 적의 소굴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魚龍 魚龍 : ?
이 직을 받고 초목도 이름을 알았도다. 더구나 軍聲이 한번 떨치니 사기는 백배나 올랐도다. 順昌 順昌 : 宋氏府名, 安微城 ?의 旗幟만 바라보면 적이 반드시 칼날을 거두었고 鳳翔 鳳翔 : 上記 扶風을 鳳翔으로 개명했는데 여기에 ?의 격문을 읽게되면 사람마다 모두 울었다. 


무사는 서로 부끄러워 죽겠다고 하였고 장보(章甫 : ?者)도 목숨 버리기를 아끼지 않았다. 의병이란 이름하는 사람이 간 곳마다 일어났으니 앞장선 이가 없었다면 누가 따라 나섰겠는가? 


더욱 중흥에 제 일의 공임을 알겠고, 南宮 南宮 : 한나라 공신들의 화상을 걸어 놓은 집이니 공신이 사십칠인이었다. ·四七 위에 높이 날 것이로다. 나중에 왜적들이 호수처럼 물러가서 鳥嶺을 넘어가 벌처럼 둔치니 神都를 말끔히 하여 백성들은 漢官을 거듭 보게 되어 기뻐했고 공경히 寢廟를 뵈오니 선비는 澗水 澗水 : 玄宗이 ?가 다시 흐름을 전하였다.


마땅히 소를 잡고 임금을 기다려야 하는데 갑자기 말을 몰아 되놈을 쫓았다. 어찌 생각했으랴. 효(梟 : 惡鳥)의 울음이 더욱 사나워지고 벌의 독이 더 부려질 주를. 바야흐로 嶺南에 토끼 굴(??) ?? 
을 파두고 湖南을 蛇食하려 하였도다. 


誰陽 誰陽 : 녹산의 난에 張?을 잃으면 강회를 잃을 것이요, 漢中 漢中 : 삼국시에 유비와 조조가 치열한 전쟁을 치루던 곳. 이곳이 유비의 촉중을 지키는 관문이었다.
은 巴蜀의 목구멍이니 한중이 없으면 파촉(巴蜀)도 없다. 


이에 촉석루를 지킬 것을 다짐하고 여러 장수들의 앞장을 섰다. 3리의 성에 몇겹의 포위를 받으니 목숨을 터럭같이 가볍고 구정(九鼎 ; 국가)은 중하다. 자식을 바꾸어 먹고 뼈를 불 때서 밥을 지었으나 적군이 날마다 불어나니 어찌 하리요. 상처를 싸매고 싸우고 피를 마시며 성에 오르니 營이 열리고 한 달이 가까워지도다. 군사를 끼고 있으면서 구하지 않았으니 누가 북해의 賀蘭 賀蘭 : 祿山亂時. 북해를 지키던 장수로 장?을 멸하리요. 성과 함께 망하니 어찌 東青의 申坦 申坦 : 육조때 송인. 전후해서 많은 전공을 세웠다. 동청은 그 소거.를 본받으리요. 


卞城陽의 충효는 一門에 모여졌고, 張中丞 張中丞 : 張?은 雷南과 더불어 같은 날에 죽었도다. 나약한 사나이가 立志할 줄 아니 모두가 의를 취할 마음을 품고 亂世에 誠臣을 알게 되니 서로가 公을 늦게 알았다고 한하는 도다. 


사람들은 모두가 대신 죽지 못함을 슬퍼하지만 공이야 실로 편안한 바를 얻음이라. 사실을 갖추어 조정에 아뢰니 주상께서 안색을 동하셨고 이에 貳公의 높은 벼슬을 내려 九泉 아래의 의로운 혼을 獎讚하였도다. 


廟宇를 세우지 못하여서 바람소리를 재우지 못함을 한하더니 이제 1년이나 끌다보니 아직도 많은 선비들이 민망해한다. 저희들은 다행히 鄭公 鄭公鄕 : 한나라 鄭玄이 살던 鄕에 文風이 盛해져 그곳은 鄭公鄕이라 했다.의 고을에 태어나서 일찍이 晉都의 덕에 젖었고 門外 門外白雪 : 遊定夫와 楊龜山이 ?의 백설에 서서 비록 束脩 束脩 : 선생에게 ? 사생이 되지는 못했지만 幕 중의 紅蓮 紅蓮 ; 燈燭. 촉대의 모습이 蓮으로 된 것을 말함.에 놀아 일찍이 투몌(投袂) 投袂 : 소매를 떨치고 일어섬을 하고 參佐에 끼얹었다. 


생각하면 공이 차마 나라를 저버리지 못함이 우리가 공을 저버리지 못함과 같도다. 東郡 東郡의 ?의 陣容을 짓지 못함이여, 宣城의 裨惠에 부끄럽도다. 九原 九原 : 晋의 ?을 지을 수 있다면 武子를 따라 가겠거니와 千載에도 오히려 살아있는 듯한 藺相如 藺相如 : ?는 泯滅되지 않는 도다. 


이에 동지들에게 널리 고하여 新宮짓기를 도모하고 암랑(巖廊 ; 朝廷)에 아뢰오니 일인즉 州牧의 일이라. 洛陽城 洛陽 : 주나라 서울. 여기서는 우리나라 서울을 말함. 즉 죽은 ? 아래에 思鄕의 蒙魂이 이미 오고 吉水의 사(?) 중에 賜額의 명령이 처음 이르렀다. 良辰 길일에 정성 모아 영을 모시나이다. 


月井峯이 만 길이나 높으니 선생의 절개가 같이 높고 榮山강이 천장(丈)이나 푸르르니 선생의 기풍이 같이 汪洋하도다. 사지와 모발은 일세에 함께 썩지만 두 글자의 화곤(華袞 ; ?字의 忠烈)은 千古에 빛이로다. 청사에 昭昭할 것이 부럽고 黃粱 黃粱 : 盧生이 都都에서 黃粱의 밥을 짓는 사이에 도사의 베개를 베고 사십년 영화의 꿈을 꾼 고사를 인용.의 草草함이 부끄럽도다. 


仁者는 반드시 勇하다는 성인의 말씀이 어찌 후생을 속였으리요. 죽어서 아는 것이 있다면 英靈이 哀薦을 느끼시려는지? 오래 오래 변함이 없어 世世로 흠향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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