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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대의 칼럼> 수은 강항의 역사적 현장을 직시(直視)해 보다!(호남과 영남 편)

담양 금성(金城)과 나주 금성(錦城), [조선 사람들이 지켜 냈더라면 해낼 길이 없었을 것이야!]라 말한 왜적무리들 증언(證言)소개
등록날짜 [ 2021년08월22일 10시54분 ]

강항은 적중봉소(賊中封疏)를 통해 분개(憤慨)한 마음을 억누르며 차분하게 우리 조선의 강점과 취약한 점을 서슴없이 주장해 글을 올린다.


적중봉소는 이예주 남쪽 30리, 지금의 오즈시에서는 40~50리 첩첩산중에 있는 금산(金山) 출석사(出石寺)의 승려 호인(好仁, 요시히토)으로부터 많은 자료를 받게 된다.

출처: '담양 금성산성' doopedia.co.kr
호인은 비전주(肥前州) 사람으로 어려서부터 벼슬을 하였던 적이 있었고, 조선에 와 본 일이 있으며, 글을 잘 알고 있으면서 문자(文字)도 곧잘 해독하였다. 그는 은퇴 후 출석사 아래 전토(田土)를 얻어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강항과 자주 필담(筆談)을 나누었다.


호인은 강항의 높은 학문의 경지에 빠져 예우가 남달랐고, 강항에게 자기 나라(왜) 사적에 관한 문헌(文獻)등도 서슴없이 보여줬다. 그 안에는 왜(倭)의 지리(地理)며 사회생활, 관제가 상세히 기록되어 있었기에 강항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필사(筆寫)하였다.


또 도도 다카토라藤堂高虎(등당고호)의 아비 백운(白雲)이 상세한 왜의 지도를 가지고 있다는 말을 듣고 지체하지 않고 통역을 시켜 필사해 오도록 했다. 거기에다가 강항은 실제로 본 왜국 형세와 우리나라 국방대책을 서로 비교하여 <왜국팔도육십육주도>를 만들고 적중봉소(무술년(1598년 완성) 글을 완성했다.


적중봉소(賊中封疏)에는 왜국백관도(倭國百官圖)와 왜국팔도육십육주도(倭國八道六十六州圖), 임진정유입구제장왜수(壬辰丁酉入寇諸將倭數)를 크게 세 가닥으로 잡아 소개되어 있는데, 이와 같이 일본 승려 호인 등에게 자료를 구하여 강항이 필사하여 주(註)를 붙이고 설명을 더한 것이다.
 

'왜국백관도'에서 먼저 일본 제왕과 관직에 대해 간략히 설명한 후 '왜국팔도육십육주도'에는 왜의 8도 66주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각 주의 관할 군, 땅의 특징, 곡식의 성장 여부, 지배자의 이름 등을 제시하고 있는데, 특히 왜 군사 수 및 장군 이름 왜의 군사제도, 왜인의 복장, 쓰시마섬(대마도)에 대한 왜인들의 태도 조선과의 관련성 속에서는 지금 봐도 놀랄 정도로 자세한 설명을 하고 있다.


이러한 ‘적중봉소(賊中封疏, 적국에서 임금께 올리는 글)’를 준비해 도원수 권율장군의 하인(종)인 울산 사람 김석복이 당시 ‘많은 돈을 주고 왜선(倭船)을 빌려서 귀국을 도모한다.’고 하여 필사본 1부를 보냈다.


이후 기해년(1599년)에 복견성에 왕건공에게 보낸 것이 1부, 다시 신정남에게 보낸 것이 1부로 이중 중국 사신인 왕건공이 가지고 간 것만이 1599년에 선조에게 도달하였다.(선조실록 1599년 4월15일자에 원문 참조),


강항은 적중봉소(賊中封疏)와 별도로 적중문견록(賊中聞見錄: 저자가 일본에서 보고 들은 것을 구체적으로 기록한 것으로 귀국 후 곧바로 조정에 바친 글.)에서 '임진정유입구제장왜수'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 조선을 침공한 왜의 여러 장수들에 대해 설명한 것으로 앞서 언급한 적중봉소(賊中封疏)에는 군사 수 등만을 제시하였고, 여기에서는 장수들의 성격, 업적, 장수들 간의 대립 등을 적나라하게 제시하였다.


특히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에 대해서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를 구체적으로 기록하였다. 그가 태어날 때 손가락이 여섯이었다는 점에서부터 원숭이 모양이고 160cm도 못 되는 아주 작은 신장(身長)에 음흉한 성격, 미천한 신분 태생과 권력을 잡는 과정, 조선 침략 계획과 실천, 양자를 죽이는 과정, 그리고 죽고 나서의 염장(鹽藏)된 과정 등의 상황까지 아주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왜(倭)의 동태를 파악한 것을 바탕으로 다시 한 번 왜(倭)에 대항하기 위한 계책을 제시하고 있음에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을 더 깜짝 놀라게 하고 만다.

적중봉소(賊中封疏) 일부의 글을 인용하면 이러하다.

“조선의 성터는 이 자(왜(倭))들의 것과는 아주 딴 판이니 정유년 싸움에 이 자들이 호남 지방에 들어와서 여러 성터를 구경하고 [저게 그래 성이야!] 흐리터분한 모양을 보고 비웃지 않은 자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담양의 금성(金城)과 나주의 금성(錦城)을 보고는 [조선 사람들이 한사코 지켜 냈더라면 우리들은 해낼 길이 없었을 것이야!]라 하였다고 합니다. 이런 이야기는 다 신(臣)이 직접 왜놈들을 따라 갔던 통역들에게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소신(小臣)의 생각으로는 우리나라 山城의 형세는 좋으나 읍 터와의 거리가 너무 먼 까닭에 급한 판이라야만 그 때야 성안 백성들을 끌고 산성으로 내달음질 치게 합니다.

그러나 정세가 좀 풀리는 것을 보면 미욱한 백성들이라 살림을 못 잊어 멀고 험한 것을 핑계로 다시 더듬어 올라가려 하지 않고 적군의 무리가 코앞에까지 밀고 들어오면 그 때에야 늙은이 어린애 할 거 없이 산으로 들로 이리 쫓기고 저리 숨고 야단법석을 떨게 되어 명령 계통이 설 까닭도 없으니 어떻게 이웃 고을로 몰아쳐 합세할 재주가 있겠습니까?


요즘 호남과 영남 지방의 성이며 읍 터는 모조리 헐 리 우고 부서져 폐허가 되었으니 차라리 이 기회를 타서 담양 부는 금성산성(金城山城)으로 옮겨 새로 건설하기로 하되 가까운 여러 이웃 고을을 털어다가 이 성을 키우고 그 근처에서 사는 백성들이나 벼슬아치들을 모조리 이 성 안으로 몰아 세워 함께 살게 해야 합니다.

살림살이의 반은 밭에다 두고 반은 읍안에다 둔다는 옛 제도를 본떠 농사철에는 처자들을 성 안에다 남겨 두고 일터인들 밖으로 나가 밭갈이하게 하며 타작 철에는 들 밖에서 걷어 들여 가지고 성 안으로 모두 들어오게 하며 주장(主將)된 사람은 농사의 빈틈을 타서 성터를 치다꺼리하되 적병이 몰아오면 그 사람들과 그 성으로 이를 막아 내게 하여야 할 것입니다.


성주(城主)되는 사람은 원만하고 통솔력 있고 재주 있고 문무가 겸비한 그런 인재를 데려다 앉혀야 합니다. 그런 사람을 물색하여 책임을 아주 딱 지워 주되 마음 놓고 꾸준히 제 일에 정진하도록 마련하여 주어야 합니다. 마치 변장(邊將)들에게 하여 주듯 성주(城主)도 마찬가지입니다.


혹 영감(令監)이니 병사(兵使: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의 준말)를 보내어 진중(陣中)에 머물러 있게 하는 것은 무방합니다. 정읍·장성은 입암(笠巖)으로 옮기고 동복 창평(東福·昌平)은 甕城(옹성:무쇠로 만든 독처럼 튼튼히 쌓은 산성(山城)이라는 뜻)으로 옮기되 금성(金城)에 예를 따르면 될 것입니다.”

영남지역 산성의 방비책 마련

강항은 거침없이 적중봉소(賊中封疏)에서 이제는 호남지방을 넘어 영남지역의 산성에 대해서도 말한다. 물샐틈없는 방비책이 최선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영남 지방 여러 산성도 이런 투로 새로 쌓아서 겹겹이 서로 바라다보게 마들며 이 쪽 저 쪽이 서로 힘을 섞여 물 샐 틈 없이 만들어 놓고 보면 놈들도 감히 전처럼 섣불리 덤벼 들 생각을 못 가질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도 말합니다. [길이 험하고 멀어서 곡식을 사들이고 푸는 데 불편이 많으므로 옛날 사창(社倉:조선(朝鮮) 시대(時代)에 환곡(還穀)을 저장(貯藏)해 두던, 각 고을의 창고(倉庫))에서 내고 들이는 그런 제도를 살려서 가까운 고장의 것은 바로 읍성으로 들여오게 하고 길이 멀면 사창으로 가져 오게 하였다가 성안 곡식은 민간 식량에 충당하는 것도 좋을까 합니다.]라는 의견입니다.


호남 지방에 있어서 흥덕 고부(興德·古阜) 두 성만은 형세가 무던하지만 이 고을 수령이나 백성들은 읍성이 싫다 하고 산성으로만 들어가 정말 급한 판에는 이도저도 다 팽개쳐 버리니 딱할 노릇입니다.


바닷가를 둘러서 띄엄띄엄 보루(堡壘)를 만들어 두는 것은 급보를 알리는 봉화의 연락이거나 수로 방비에 없지 못할 시설이기 때문인데 이게 되려 폐단이 우심하여 애들 장난같이 되어 버렸으니 어찌합니까?


첨사(僉使조선 시대 각 진영(鎭營)에 속한 종3품의 무관으로, 첨절제사(僉節制使)의 약칭.)니 만호(萬戶:조선(朝鮮) 시대(時代)에 고려(高麗)의 제도(制度)를 받아들여 두었던 종4품(從四品)의 무관(武官) 벼슬.)니는 돈만 받아 처먹고 문서를 닦아 죄다 죽어 버린 양으로 꾸며 놓으니 말입니다. 정작 난리가 나면 해병 수졸(守卒)이라고는 한 놈도 없이 텅 빈 성에 찬바람만 휘돌게 되니 웃지도 못할 일입니다.


더구나 영암 백성들을 해남 포구에서의 싸움에 참가케 하고 보성(寶城)사람을 실어다가 순천 보루를 지키게 마련이니 오며 가며 당하는 고생이야 더 말할 나위도 없지만 이리 핑계고 저리 도망치는 징용패들을 뉘 재주로 찾아내고 뉘 재주로 잡아 올 수 있겠습니까?


차라리 갯가 졸막졸막한 보루들은 모조리 덜어 버리고 갯가에 있는 고을들은 연변 중요한 고장으로 한데 뭉쳐 놓되 보루를 지키는 군졸들도 다 이 고을에 소속시키도록 하고 이 고을 백성들로 하여금 그들의 고장을 지켜내게 하여야 합니다.


수비 군졸들은 방비 훈련 이외의 잡역(雜役)으로 괴롭혀서는 안 됩니다. 또한 갯가 물싸움 이외의 흐리터분한 일거리를 맡겨도 안 됩니다. 평상시에는 전함(戰艦)을 만들어 바다에 띄워 놓고 성 밑에 백성들이나 수비 군졸을 가릴 것 없이 한데 모아 번갈아 병기 사용법이며 물싸움의 훈련을 철저히 하되, 변란이 일어나면 휩쓸어 통제사(統制使:삼도 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의 준말.)의 지휘 하에 들게 하고 각자 맡은 바를 제가끔 수행하도록 하면 성 싸움이나 바다 싸움에 넘어질(패배) 염려는 아마 없을 것입니다.”

적중봉소(賊中封疏)를 통한 애국애족정신의 실천

적중봉소(賊中封疏)가 조속히 선조에게 들어가길 기원하며 아마도 강항은 하루 이틀의 시간들이 피를 말리는 심정이었을 것이며 날마다 시급성을 갖고 안타까워했을 것이다.


이 문서가 하루 바삐 국왕에게 들어 가 유비무한의 자세로 조선의 한 판의 역전(逆轉)승을 기대했을 것이다. 모두 넋이 빠지고 손을 놓고 있는 틈을 보이지 말고 적중봉소(賊中封疏)를 통해 수습책을 마련해 적극 대응하기를 바라면서 이렇게 만반(萬般)의 방비(防備)책을 다 갖추고 나서 왜(倭)를 과감하게 격퇴(擊退)시킬 것을 당당하게 주문한다.

그럼 강항은 왜(倭)에게 한없이 저주를 퍼 부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절대다수(絶對多數)의 왜인들의 가엾은 모습에 ‘너희는 이렇게 무지(無智)하게 당하지 말고 글을 알고 문자를 통해 무사(사무라이)들에게 무조건적으로 굴복(屈伏)하지 마라.’고 강항휘초를 남기게 된 것이다.


소위 일부 학자들의 주장처럼 ‘퇴계학을 강항이 전수했느니, 주자학, 성리학을 전수했느니’ 가 아니라 99% 왜인들의 무지(無知)함을 깨우쳐 이들 왜인들이 바로 세우는 왜의 국가를 원했던 것이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영원히 조선에 대한 무자비한 침공(侵攻)은 결코 없을 것이며 이웃나라로 태평(太平)하게 잘살 것임을 강항휘초를 전수함으로써 이를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나마 이후 왜(倭)는 도량과 학식이 있는 그의 제자(후지와라 세이카, 하야시 라잔)들이 에도시대의 국가적 교육을 담당해 근대 일본을 창조(創造)했으나 이번에는 그로 인한 왜인들의 천성(天性)때문에 약육강식으로 번져 낭인(浪人) 중 1% 지식층과 무사들의 자기세력결집으로 번져 또 다시 지금의 일본이 되었음에 지하에 있는 강항은 이 광경을 지켜보며 할 말을 잃을 것만 같다.


지금 우리가 선양(宣揚)사업을 하고자 하는 이유가 바로 99% 선량한 평민(平民)인 일본인들과 민간교류를 갖고자 함이 마침내 내린 결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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