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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대의 칼럼>수은 강항의 역사적 현장을 직시(直視)해 보다! (광양수월정 역사왜곡 2편)

수월정기를 둘러 싼 수은 강항과 송강 정철 중 위작(僞作)자 존재해..내일이 아니고 오늘 시점서 분명코 바로 잡아야
등록날짜 [ 2021년09월04일 14시42분 ]

2015년부터 무려 6년간 끊임없이 제기한 ‘광양수월정 기문(記文)의 역사왜곡’이 지난 9월 2일 광양시청의 수월정 기문 안내판 설치에 병기(倂記) 수정으로 최종 결론이 났다.

 


지역사회에 뜨거운 감자가 된 광양수월정기

  이러한 역사왜곡 수정과정을 명확하게 이해를 돕기 위해 광양수월정을 둘러 싼 역사왜곡의 심각성을 지적한 지역신문에 실린 기사를 우선 참고할 필요가 있어 소개한다.


“수월정자를 건립한 연도가 1573년(癸酉)이라면 문제가 심각해진다. 나주목사를 역임한 정설은 1547년(丁未)에 태어나 1643년(癸未, 향년 96세)에 세상을 하직했으니 수월정을 건립했다는 그해 정설은 26세였다. 설은 선조 6년(1576, 丙子)에 등과했음으로 등과 3년 전에 광양에 와서 정자를 건립했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오히려 그 때가 계유년이라면 아버지 정인관의 나이 80세가 된 해이니 아버지인 인관이 정자를 건립했을 것으로 유추해 볼 수 있다. 정설의 아버지 인관, 사마방목에 의하면 중종 38년(1543년, 계유, 50세)에 진사가 되고난 후 명종 7년(1552년, 임자, 59세)에 식년문과에 급제 했다. 전적(성균관 6급 직)ㆍ보성군수ㆍ영천군수ㆍ밀양부사ㆍ장흥부사)를 역임했다.”출처 : 광양뉴스(http://www.gynet.co.kr)


 

광양시에서는 줄 곳 문화관광 사업지역으로 섬진강 일대를 조성(造成)해 왔으며 관광의 명소인 ‘매화마을’과 함께 광양수월정’도 항상 관광객의 발걸음이 꾸준히 증가해 오고 있는 추세이다.


 

이러한 관광명소에 광양수월정기가 잘못 기록되어 내려오고 있어서 수은강항선생 기념사업회(회장 박석무 이하 기념사업회)에서는 그 왜곡을 바로 잡으려 노력을 해 왔다.



마침내 그 결실로 광양수월정의 안내판이 병기(倂記)해 설치하기로 결정되었으니 그 수월정기를 둘러 싼 두 위인(偉人 수은 강항과 송강 정철) 중 위작(僞作)자가 존재한다는 것을(안내판을 읽어 보면) 문맥에 의해서라도 금방 알게 될 것이다.


광양지역신문에 글을 쓴 조동래 향토사학자는 계속해 “정접(鄭渫)이 만년을 보냈던 곳으로 그 뒤 송강 정철이 수월정기(水月亭記)를 썼다.”라고 역설하는데 그렇다면 위에서 밝힌 수월정자를 건립한 연도가 1573년(癸酉)은 수월정 유허비의 건립연대이고 수월정 건립은 1573년(癸酉)이 아니라 정접이 만년(晩年)을 보냈다고 하는 1598~1600년이라고 대부분 역사학자들은 학술대회를 통해 주장하고 있다.


더 나아가 불과 120여 년 전에 도용(盜用)했다면 후손의 문제가 제기되었고 그 위작에 가담했던 역사를 지금이라도 누군가가 나서서 바로 잡아야 된다면 이는 기념사업회가 적극 나서서 역사바로세우기에 역할을 다해야한다고 관계자는 전언해 왔던 것이다.



이에 수월정기의 역사적 진실을 위해 지역 신문의 일부 내용을 계속해 인용해 본다.



“수월정 기문은『송강집』속집 2잡저 편에『수월정기』라는 이름으로 실려 있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속집은 본래 1677년에 편집되었지만, 발간 때에 모여진 것인지에 대해서는 전혀 분간할 수 없다. 그런데 굳이 추정하자면 수월정기문은 1894년 무렵에 수집된 것일 것 같다. 왜냐하면 속집은 충청도 단양출신 이선이 수집한 것이기 때문이다. 서울에서 관료생활과 충청도에서 스승 송시열 현창사업에 몰두하였던 그가 광양에 있는 수월정의 기문을 발견하였을 가능성은 아무래도 낮아 보인다. 수월정 시가 1894년 무렵에 모아진 별집에 수록된 것으로 보아 더더욱 그렇게 여겨진다. 수월정기문은 시와 함께 1633년에 발간 송강집의 원집에는 보이지 않다가, 나중에 포착되어 별집 발간 때에 실렸음이 분명하다. 송강의 수월정기문은 정철이 辛○년 가을에 지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위와 같이 역사적 진실은 수월정 기문이 1894년 무렵에 ‘송강집’이 모아진 별집에 수록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또, 위작의 증거가 되듯 수은과 송강의 수월정기가 무려 36군데나 자구(字句) 또는 글씨가 왜곡이 되어 상이(相異)한 기록으로 송강의 수월정기가 남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최근 조성된 수월정기의 안내판에 기념사업회 측의 수정문구로 설치됨에 대해 그 과정을 알아 보고자한다.


 

기념사업회 일행 광양수월정 탐방

지난 6월 2일 6년 여 만에 강재원 영광내산서원보존회장과 기념사업회 일행이 광양수월정에 방문해 더 역사왜곡으로 날조된 안내판을 보고 광양시 최 모 학예사를 현장으로 불러 세웠다.


이후 학예사와 전화 통화를 거듭했으나 별반 반응이 시큰둥해 수신자를 광양시장명의 공문으로 발송하고 조치를 거듭해 압박해 갔다.


 

특히 중요하게 생각되는 병기관련 수정 작업에서 수은 강항과 송강 정철이 동시에 지었다는 잘못된 시각을 수은 강항이 짓고 나서 송강 정철도 지었노라고 문맥의 흐름을 바꾸도록 했다. 그래서 누구든지 병기된 안내판을 바라보게 된다면 씁쓸한 입맛을 다실 수밖에 없게 의도한 것이다.


 

수월정기의 수정전과 후의 비교

이번에는 광양시에서 먼저 보내온 수정전 수월정기 안내판 문구를 소개해 쉬운 이해를 돕고자한다.


 

수월정水月亭(수정 전)


수월정은 조선 선조때 나주 목사(1598. 1. ~ 5.)를 지낸 정설(鄭渫 : 1547-1643)이 만년晩年을 보내기 위해 세웠다고 전해진다. 수월정과 관련하여 수은 강항(姜沆 : 1567-1618)은 「수월정삼십영(水月亭三十詠)」, 「수월정기(水月亭記)」와 송강 정철(鄭澈 : 1536-1593)이 지은 「수월정기水月亭記」가 전하고 있다.

 

                            -수월정삼십영水月亭三十詠 中-
                                                                          
                                                                          강항(姜沆)
백운추월(白雲秋月: 백운산의 가을 달)
一片氷輸萬里浮                                     白雲山上白雲秋
일편빙수만리부                                     백운산상백운추
한 조각 차가운 달이 만 리에 떠 있고                백운산 위에는 흰 구름이 뜬 가을이네

 

憑誰問着此時月                                     應照長安明月樓
빙수문착차시월                                     응조장안명월루
누군가에게 이 때의 달이 어디를 비추냐고 묻는다면/당연히 장안 명월루에 비춘다고하리라.『睡隱集 一, 1658』


  수은 강항(睡隱 姜沆) , 「수월정기」 , 「수월정삼십영」,  『간양록』 등
   -명종 22년(1567, 1세) 영광 유봉리 출생  
   -선조 25년(1592, 26세) 임진왜란 시 군량과 군기를 고경명에 보냄
   -선조 30년(1597, 31세) 김상헌과 의병 모집, 일본으로 끌려감
   -광해군 10년(1618, 52세) 지병으로 세상을 떠남.

 

-水月亭記 中-      강항(姜沆)
士大夫之進不得有爲於斯世。棄位而巷處者。必謀明山麗水之濱 池館苑囿之樂
사대부지진부득유위어사세。 기위이항처자。필모명산려수지빈。지관원유지악
(문중에서 활용되고 있는 해석)      『睡隱集 三, 1658』

 

-水月亭記 中-      정철(鄭澈)
浮光躍金。靜影沈璧。而水得月而益淸。月得水而益白。直與侯之胸次。
부광약금。정영침벽。이수득월이익청。월득수이익백  직여후지흉차
(송강 정철 선생 문중에서 사용되고 있는 해석)     『松江集 續集 卷一, 1677』


  송강 정철(松江 鄭澈), 수월정기, 관동별곡, 성산별곡 등
 -중종 31년(1536, 1세) 서울 장의동 출생  
 -선조 23년(1590, 55세) 좌의정, 인성부원군 봉호 
 -선조 26년(1593, 58세) 강화우사(江華㝢舍)에서 세상을 떠남

(광양시청 문화예술과 최00입니다. 상기의 글과 같이 수월정 관련하여 자료를 보내드립니다. 수월정삼십영 중 '백운추월'을 선정하였으며 해석은 광양시지에 실려 있는 것으로 작성하였습니다. 해석이 다르게 될 수 있어 문중에서 사용되고 있는 것이 있으면 보내주십시오. 수은 선생에 대한 약력을 명기하여야 관람객들에게 도움이 되고자 추기 하였으며 잘못 된 부분이 있으면 수정하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수월정기 또한 일부분만을 명기하고자 합니다. 해석 역시 문중에서 해석한 책자에 실려 있는 것으로 문안 작성할까 합니다. 요청 드립니다. 최00 올림(061-797-2418))


 

이 수월정기의 글 외도 세 번이나 거듭 보내온 이메일에 대한 기념사업회의 해답으로 이어지는 수월정 안내문의 최종 수정문은 아래의 수월정기문이다.


 


수월정水月亭(수정 후)

수월정은 조선 선조때 나주 목사(1598. 1. ~ 5.)를 지낸 정설(鄭渫 : 1547-1643)이 만년晩年을 보내기 위해 세웠다고 전해진다. 수월정과 관련하여 수은 강항(姜沆 : 1567-1618)은 「수월정삼십영(水月亭三十詠)」, 「수월정기(水月亭記)」를 지었는데 송강 정철(鄭澈 : 1536-1593)도 「수월정기水月亭記」를 지었다고 전하고 있다.


 

수월정기水月亭記                          수은 강항睡隱 姜沆 『수은집』 권 3- 「記」

士大夫之進不得有爲於斯世。棄位而巷處者。必謀明山麗水之濱。池館苑囿之樂。一以爲淸閑寂寞之娛。一以抒憂時戀闕之懷。六一翁之於穎上。杜祁國之於睢陽。皆是已。①前牧使光州鄭侯。年五十而棄於時。遂求先大夫玉川先生之別業於光陽。距先廬十里許而居之。選勝爲亭。以水月爲名焉。余觀夫南方之山。巍然高者以千數。而白雲爲最奇。南方之水。可行舟者以十數。而蟾江爲最大。以白雲之東麓爲屋山。而以蟾江之上流置屋下。則勝絶有不暇論也。而況天下之三神山。方丈居其一。煙火食人之生世間。聞方丈之名者亦罕矣。其於起居飮食。早夜相對者。何如哉。左嶺右湖。控引島蠻。商舡之所走集。市賈之所輻湊。岳陽朝嵐。鶴洞暮煙。躑躅成山。火雲成峯。霜落而千林紅。氷塞而長河白。千態萬狀。畢集於几席之下。則此水月之所以選勝也。②兵火十年。文物一空。而水月則依舊也。世降俗末。人心不古。而水月則猶前也。市道日巧。一錢俱湧。而水月則無價也。棄枯集菀。門雀可羅。而水月則不遐也。逝者如斯而未嘗往也。盈虛者如彼而卒莫消長也。浮光躍金。靜影沈壁。水得月而益淸。月得水而益白。直與侯之胸采。上下乎同符。則此水月之所以得名也。余雖不獲登公之亭。而幸嘗竊誦公之歌。見公之書。已得水月之大槩。而若公之心則余固知之。於是乎書。 


수은 강항睡隱 姜沆  광양 「수월정기」, 「수월정 30영」 등
  -명종 22년(1567,  1세) 영광 불갑면 유봉리 출생  
  -선조 30년(1597, 31세) 김상헌과 의병 모집, 일본으로 피로(被擄)됨
  -선조 34년(1600 34세)  『강항휘초』, 『강감회요(綱鑑會要)』, 『간양록(看羊錄)』, 『수은집(睡隱集)』 등
  -광해군 10년(1618, 52세) 지병으로 세상을 떠남.

 

 수월정기水月亭記                       송강 정철松江 鄭澈 『송강집』 속집 권 2-雜著

士大夫之進不得有爲於斯世棄位而巷處者必占名山麗水之濱池館園囿之樂一以爲淸閒寂寞之娛一以敍憂時戀闕之情歐陽公之杜祁公之睢陽皆是已前錦牧光山後人鄭侯渫年五十而棄於世也遂求先大夫玉川先生之別業於光陽距先廬四十里而居之選勝築亭名曰水月余觀夫南方之山嵬然高者以千數而白雲爲最奇南方之水 可勝舟者以千數而蟾江爲最大以白雲之東麓爲屋上而以蟾江之上流置屋下形勝有不可論也而況天下之三神山方丈居其一煙火食之生世間此山之名者亦罕矣其於起居飮食早夜相對爲如何左嶺右湖控引島巒來船去舳雲飛而鳥逝官津野墟魚鱗輻湊渭川千畝鄴水朱華鶴洞朝嵐岳陽暮煙躑躅成山火雲成峯霜落而千林紅氷塞而長川白態萬象畢集几房之下則水月之所以選勝也

兵火十年文物一空而水月則依舊也世降俗末人心不古而水月則猶昔也市道日巧一錢且涌而水月則無價也棄枯集菀門雀可羅而水月則不遐也逝者如斯而未嘗往也盈虛者如彼而卒莫消長也浮光躍金靜影沈璧而水得月而益淸月得水而益白直與侯之胸次瑩澈同符焉則水月之所以命名也余雖不獲登侯之亭誦侯之歌見侯之書粗得水月之萬一而若侯之方寸則余固知已故於是乎書辛 缺 秋旣望烏川鄭某

(수은집의 수월정기와 비교해 자구나 글씨가 차이난 부분을 빨간색으로 표기해 구분지어 놨음)


  송강 정철松江 鄭澈, 광양 「수월정기」, 「관동별곡」, 「성산별곡」 등
 -중종 31년(1536, 1세) 서울 장의동 출생  
 -명종  6년(1551, 16세) 창평으로 이사, 김인후와 기대승에게 수학
 -선조 23년(1590, 55세) 좌의정, 인성부원군 봉호 
 -선조 26년(1593, 58세) 강화우사(江華㝢舍)에서 세상을 떠남

 


이를 종합해 말하자면 현대사회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게 저작권 침해 시비이다. 옛날에야 저작권에 대한 시비가 거의 없었으니 후손이나 제자들에 의해 마구 베끼고 가져와 붙이고 출처를 밝히지 않고 사용한 게 다반사였을 거라고 감히 지례 짐작한다.

 

 

그러나 세월은 변했고 역사인식도 날로 변화되어 가고 있다. 그렇다면 이제는 광양수월정에 대한 올바른 역사를 바로세우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된다.

 

 

왜냐면 인터넷의 발달로 가상세계의 인터넷의 홍수 시대에서 광양수월정을 찾는 사람이라면 안내문에 기록된 그대로를 인식하게 된다. 이러한 관광객들의 잘못된 역사의식(意識)을 바로 잡아 줘야만 한다.

 

이처럼 비슷하게 베껴서 광양수월정기의 잘못된 기록이 후대로 이어져 전해진다면 이는 후손들의 큰 잘못은 물론이고 지역사회에 고약한 역사왜곡이라 주장을 하는 것으로 항상 내일이 아니고 오늘 시점에서 분명코 바로 잡아야 한다.

(추신 : 글을 기록하면서 잠시폰트가 변해 전후 좌우글이 뒤죽박죽되었음을 용서바랍니다. 곧바로 발견해 즉각 수정했음을 알리는 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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