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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은 강항의 역사적 현장을 직시(直視)해 보다!(영광 백수 지산마을 편)

죽창(竹窓) 정홍연(鄭弘衍)왈(曰), “대 선비 수은 필적(筆跡) 옆에 글을 댄다는 것은 더더욱 그럴 수 없다”
등록날짜 [ 2021년10월04일 17시38분 ]

수은 선생과 정 익산의 만남

전남 영광군 불갑 유봉마을과 백수 지산리 가지매 마을은 양쪽마을 중앙에서 직선거리로는 8km 옛길로 보면 15km가 훨씬 넘는 곳이다. 물론 선비가 걷거나 말 타고 유유자적하며 정자나 주막 등지에서 쉬어가며 오고간다면 하룻밤 유숙(留宿)하고 되돌아 올 수 있는 거리라 하겠다.


이 지산리 가지매 마을에 '수은집' 에서 정 익산이라 칭하는 정홍연(鄭弘衍)이 살면서 수은 선생과 교유했다고 전하고 있다. 기록을 보면 정 익산의 본관은 동래, 자는 덕일(德逸), 호가 죽창(竹窓)으로 서울에서 1565년(명종 20)에 태어났다. 그는 광해군 때에 선공감 감역, 제용감 판관, 거창현감, 양천현령, 동복현감, 익산군수 등을 역임하였다.


정 익산이 예순에 접어든 1624년부터는 관직을 그만두고 1639년(인조 17)에 가지매 마을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는 수은 선생이 왜국에서 돌아온 1600년부터 명성을 듣고 찾아와 교유한 것으로 보인다.


죽창에 대해서는 '영광읍지' 본조음사 조항에 “호가 죽창으로 동래인이며 지산(芝山)에 지산사(芝山祠)가 세워졌다.” '죽창집'  해제만이 참고 될 따름으로 수은 선생의 자(아들)인 강시만(姜時萬, 1603~1673)이 죽창의 만사에서 “昔我先君友 追隨金石堅 習池同醉月 金谷共華筵(죽창은 나의 아버지 친구로서 서로 상종하시기를 금석과 같이 하셨고 달빛 아래에서 흥겨운 주연을 함께 즐기셨다.)”이라고 하였다.



수은 선생과 정 익산과의 시 소개
 
'수은집' 속에는 정 익산과 교유한 시문이 수록되어 있다. 그 가운데 정홍연을 직접 거명된 시 두 편을 소개해 그 당시를 목격해 본다.


 

(鄭益山 欲以 醉仙 弟妹 試我戲寄)

소교(小橋) 의 집이 구봉(九峯)의 서편에 있는데
들으니 어여쁜 딸 아직도 어리다한다.
居士는 雲雨가 꿈에 든 걸 모르는 사람
선심(禪心)이 버들강아지 진흙에 붙듯 했다.
부끄럽다!! 산새가 단판(檀板)에 놀라는데
청란(靑鸞)이 목계(木鷄)와 짝짓기를 허락하랴
여려(茹藘) 빛 고의가 나를 즐겁게 해주어
반평생을 밥상 받치며 상에 눈썹 맞추거늘...

 

「정익산(鄭益山)이 취선(醉仙)이란 제매(弟妹)로 시험하고자 하여 희작(戲作)하여 보내다」이다. 정 익산이란 익산군수를 역임한 죽창 정홍연을 지칭한다. 정홍연이 익산군수를 역임한 때는 1622~1623년으로 수은 선생이 타계하고 나서다.


그렇다면 본래는 정홍연의 자 덕일(德逸), 또는 죽창(竹窓)으로 표기했어야 하는데 정 익산으로 관직을 지칭하고 있다. 이는 지금도 우리사회에서 도지사 또는 시장, 군수로 퇴직하고 나서도 그 마지막 관직명을 성씨에 붙혀 호칭하듯 불리는데 예전에도 그러했던 것으로 해석해 본다.


거듭 설명을 하자면 정홍연을 정 익산이라 한 것도 수은선생의 직계 후손이 '수은집' 을 편집할 때에 정홍명을 ‘정 익산’이란 관직으로 자나 아호대신 기록했을 것으로 짐작해 보는 것이다.


위의 시를 음미해 보면서 좀 더 자세한 내용을 들여다 보기로 하자. 

 

“소교(小橋)의 집이 구봉(九峯)의 서편에 있는데
들으니 어여쁜 딸 아직도 어리다한다.”

소교(小橋)는 주유(周瑜)의 아내로 조조(曹操)가 적벽대전에서 오나라를 점령 후에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뤄 절세가인인 소교(小橋)를 곁에 두고 즐기겠다는 미인을 지칭한다. 이러한 어리며 미인인 딸이 ‘구봉(九峯)의 서편’에 있다고 말한다. 백수읍의 뒷산 아홉 봉우리 구수산은 백수의 정중앙에 위치하며 상징적인 산이다. 이 구봉에 정확하게 서쪽 편으로 지산 가지매 마을이 자리하고 있다.


“여려(茹藘) 빛 고의가 나를 즐겁게 해주어
반평생을 밥상 받치며 상에 눈썹 맞추거늘...”


아래  별도의 주석(註釋)을 잘 살펴보면 어려운 고래(古來)의 뜻을 가진 한자어가 쉽게 다가와 비교적 이해가 빠를 수 있으니 참고하기 바란다.

이때 정 익산이 ‘수양딸’(기생?)로 하여금 수은의 수청(守廳)을 들어주라고 했는데 ‘茹藘와 같은 고의(黑白間色의 옷) 입은 本妻’ 즉 반평생 동안 밥상 차려준 본처(조강지처) 생각에 정중하게 거절한 시편(詩篇)이다.


이를 '수은집' 속에서는 정익산(鄭益山)이 취선(醉仙)의 제매(弟妹)로써 나를 시험하고자 하므로 희작(戲作)하여 보내다는 제목으로 소개하고 있다. 사실 이 부분도 수정을 가해 어떤 부분에서는 수양딸, 첩실, 기생 등으로 또 다른 부분에서는 제매(弟妹)로 표기되어 시문의 수정에 대한 혼돈을 야기하고 있다.


또 다른 시에서는 자연의 풍광의 조화를 노래한다. 시만이 만사에서 말하기를 '달빛 아래에서 흥겨운 주연을 함께 즐기셨다.'고 기록한바와 같이 두사람은 늦은 오후 해질무렵부터 늦은 저녁까지 선유(船遊)를 즐기며 회포를 풀고 수많은 배가 바다에 두둥실 떠 있음에 더해서 봄의 경치를 노래했다. 선상에서 주고 받은 시 중 수은의 차운시를 소개한다.


배 안에서 정익산의 운(韻)을 차(次)하다(舟中次 鄭益山 弘衍 韻)

小橋家在九峯西。聞說春魂未解迷。
居士不知雲作夢。禪心已似絮黏泥。
自慙山鳥驚檀板。忍許靑鸞伴木鷄。
茹藘縞衣聊樂我。半生曾擧案眉齊。
風輕海闊暮帆斜。已落殘陽又月華。
躑躅成山君莫算。滿船淸唱盡名花。

 

가벼운 바람 넓은 바다에 저문 돛이 비꼈는데
남은 볕이 지고 나니 또 다시 달빛이라
철쭉꽃 산에 핀 것을 그대는 논하지 말라.
온 배에 맑은 노래 모두가 名花로다.
「배 안에서 정익산의 운을 차하다」이다.

수은은 영광군수와 함께 선유(船遊) 놀이가 예약되어서 어느 봄 날 서포(西浦, 논잠포)에 갔다. 이른 봄철로 여겨진다. 철쭉꽃이 활짝 피어 있는 아주 화창한 봄날에 수은 선생은 정 익산과 같은 배에서 정 익산이 선창을 하며 시를 짓자, 그에 차운(次韻)을 했다. 

 

 위의 시를 일독(一讀)해보면 수은 강항도 운제마을을 떠나 구수산 가지매 마을이나 서포(西浦, 논잠포) 등 영광 서쪽 지역을 자주 방문하였음을 알 수 있고, 그것은 자연스럽게 정 익산과의 교유로 이어졌을 것이다.

 

이번에는 수은 선생과 정 익산과의 교유관계를 두루 살펴보기로 한다. 서울을 떠나 객지인 영광땅에 정착하게 된 정 익산에게 영광은 낯 설은 지역으로 새 터전을 잡는 데에 대학자인 수은 강항이 옆 마을에 거주하고 있음에 심적으로 매우 든든한 버팀목이 되었을 것이다.


그가 말년에 지은 시 한 수를 들여다 보면 향토에서 수은 강항에게 오롯이 의지했던 부분이 눈앞에 그려질 정도로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으며 선생에 대한 애절하고 그리워하는 심정이 절절하게 녹아 그리운 님(수은)을 꿈속에서라도 만나보고픈 심정이 단장(斷腸)을 끊일 듯 하다.
 

나이 칠십 되가는데 친구는 없고(年來七十故人空)
수은은 어디 갔나 물만 동쪽으로(睡隱何歸水浙東)
오직 그대만 있어서 어울렸더니(唯有吾君同調友)
생각하니 응당 꿈에서나 만나겠지(相思應想夢魂通).

 

이 시는 수은 선생 사후에 정 익산이 지은 것이 분명하다. 총기가 흐려지고 환갑의 나이가 훌쩍넘어 나이 칠십이 다 되어감에 수은 강항이 곁에 없음을 허전해하며 노래했다. 또, 수은 선생이 1600년 귀국하여 새 터전으로 일군 불갑면 운제(雲堤) 마을 이름을 정 익산이 지었다고 전한다.


그 해 어느날 정 익산이 불갑에 강항을 찾아왔을 때 때마침 마을 동산에 구름이 걸린 형국을 보고 운제(雲堤)라 이름을 지어주었다는 양쪽 문중어른들의 전언(傳言)에 굳이 설명이 없더래도 들을수록 두 인물간의 교유가 남달리 돈독했음을 엿볼 수 있다.
 

 
수은 강항선생을 흠모하고 존경한 정 익산

이번에는 '수은집'에 의현(義玄)으로 나오는 승려 현상인(賢上人)에 대해 알아보면서 정 익산이 얼마만큼 수은 선생에 대해 의지하고 존경했는지를 알아 보기로 한다.


어느 해 봄에 승려 현상인(賢上人)은 수은을 찾아와서 시축(詩軸) 서문을 요청하였다. 가을에 사미승을 보내서 거듭 재촉하며 두류산⋅금강산으로 떠난다고 해 하는 수 없이 강항은 서문(序文)을 지어주었다.


이와 관련된 시문이 '수은집' 에
「贈玄上人用玄洲韻」, 「題義林詩軸」, 「僧義玄求詩」, 「送義玄入頭流序」로 기록되어 있다.


그 해 승려 현상인(賢上人)은 이번에는 정 익산이 기거하고 있는 지산리 가지매 마을을 찾아 가 수은의 율시(律詩) 한편을 읊어 주면서, 정 익산으로 하여금 그에 대해 창화(唱和)해 달라고 요청했다.


현상인(賢上人)과의 친분관계로 안할 수는 없었지만, 자신의 능력이 부족함에 사양하면서 ‘대 선비 수은 필적 옆에 자신의 글을 댄다는 것은 더더욱 그럴 수 없다’고 난색을 표했다.


당시 수은은 문장과 인물이 높아 그의 글을 받아가려는 사람이 줄지어 섰지만, 자신은 그렇지 못해 한사코 사양하였던 것이다. 그렇지만 승려 현상인(賢上人)은 수은의 편지까지 내보이며 간곡히 요청을 더 이상 저버릴 수 없어 하는 수 없이 글을 적는다고 기록되어 있다.


참고로 '죽창집'에는 이 현상인(賢上人)에게 지어준 시가 여러 편 수록되어 있다고 전해진다.

 

여기서 필자가 강조해 말하는 바는 이러하다. 정 익산과 수은 선생의 교유관계에 대한 번역서인 '수은집'을 들여다보면서 가장 유의(有意)해야 하고 매우 조심스러운 것은 후손들이나 전문학자들이 '수은집' 등의 문적(文籍)을 다룰 때 그 당시의 존칭에 대한 한자어나 한문에 대한 번역은 결코 수정을 가하지 말고 원문에 충실하게 번역해야 될 것이라고 강력히 주문하는 바이다. 


한 획만 틀려도 일파만파로 해석이 다를 수 있고 오역으로 인해 수많은 수정을 거쳐야만 하기 때문이다. 특히 중국고서나 고문, 역사서에 나오는 단어나 용어의 사용은 그야말로 세밀하게 들여다 봐야만 할 것이다. 


그렇다하여 당장 이 글을 쓰면서 호칭이나 해석들을 다시 원문내용으로 바꾼다는 것도 참으로 조심스러워 1980년대 판의 '수은집' 번역서 내용에 충실했음을 밝힌다. 다만 앞으로 호칭이나 원문과 다른 해석들은 큰 틀에서 당장 시급한 연구 과제라고 하는 생각에 조금도 변함이 없음을 분명하게 밝히는 바이다.


<편집자 주>
小橋 : 後漢 橋氏의 二女가 絶美하여 一은 吳의 孫權에게 一은 周瑜에게 갔는데 曹操가 말하기를 江南을 征服하면 二橋를 銅雀坮에 두고 즐기겠다고 하였다.
雲雨 : 楚襄王이 兩山에 놀러갔다가 畵夢에 坐山의 神女와 相交했는데 神女가 떠나며 아침에는 行雲이 되고 저녁에는 行雨가 되어 맞겠다고 하였다.
茹藘 : 풀 이름이니 옷빛이 이 茹藘와 같은 고의(黑白間色의 옷) 입은 本妻를 말한다. 詩經 고衣茹蘆聊樂我云
案眉齊 : 漢 梁鴻의 妻 孟光이 鴻에게 밥상을 올리면 그 눈썹이 상의 전과 가지런했다는 고사 인용으로 賢妻를 칭하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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