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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곤칼럼>잃어버린 10년 (4)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독립협회 강제해산 (1)
등록날짜 [ 2021년10월14일 12시00분 ]

1898년 12월 25일, 고종은 군대를 동원하여 독립협회를 강제 해산시켰다. 이로써 고종은 국민과 함께 하는 개명군주가 아닌, 백성을 신민(臣民) 취급하는 전제군주가 되었다. 독립협회 강제해산은 1897년 11월 20일 독립문 준공식이 있은 지 13개월 뒤에 일어났다. 그동안 무슨일이 일어났나?  

   
1897년 5월에 서재필은 독립문 건립 추진과 함께 모화관(慕華館)을 개수하여 독립관이라 이름하고 8월 29일부터 매주 토론회를 개최했다. 


1898년 2월 13일, 제21회 토론회에서는 ‘구국 선언상소’를 결정했다. 정치 참여 선언이었다. 3월 10일 오후 2시에 서울 종로의 저잣거리에서 민회(民會)가 열렸다. 민회에는 1만여 명의 시민이 모였는데 당시 서울 인구 19만 6천 명의  5%가 모인 것이다.


‘원조 촛불’이라고 불리는 이 집회는 ‘글이 아닌 말로 정치 참여’를 하는 길을 열었고, 민중과 연사가 자주 독립권 수호를 위한 확고한 결의를 내외에 과시했다. 모임은 당초엔 ‘민회(民會)’라 했으나 만 명이나 모이자 ‘만민공동회’라 불렸다.


 

만민공동회에서  시민들은 러시아의 부산 절영도(지금의 영도) 조차(租借) 요구 철회와 한러은행 철수, 그리고 러시아 군사교관과 재정고문의 해임을 요구했다.

 

이러자 고종은 만민공동회의 열기와 러시아 측의 압력 사이에서 고심하면서 대책 마련에 부심하였는데, 원로의 자문과 내각 회의를 통해 러시아 공사관에 군사교관과 재정고문의 철수를 요청하는 회신을 보냈다.

 

이 시기 러시아는 한반도보다도 만주 경영이 급선무라 여겼기에 한반도에서 한발 물러나기로 결정하였다.

 

3월 17일에 러시아 정부는 “한국 민중의 여론이 이와 같으면 재정고문과 군사 교관들을 철수하는 것이 가하다.”고 주한 러시아 공사에게 훈령하였다. 이에 스페이에르 주한 러시아 공사는 고종에게 절영도 조차 요구 철회와 재정고문 및 군사교관의 철수를 통고하였다.

 

3월 24일에 고종은 탁지부 재정고문과 러시아 교관들을 파면하였고, 이어서 3월 1일에 개설된 한러은행도 문을 닫았다. 러시아 정부는 스페이에르를 4월 12일 자로 마튜닌으로 교체하여 한반도에서 후퇴 조짐을 보였다. 일본도 그들의 절영도 석탄고 기지를 한국 정부에 돌려보냈다.

 

한편 3월 10일 만민공동회 개최에 경악한 고종은 즉시 견제에 나섰다. 3월 15일에 고종은 특명을 내려 독립협회 회원 지석영, 이원긍, 여규형, 안기중을 구속시켰다. 지석영 등 4명이 구속되자 3월 20일에 독립협회는 항의 투쟁을 하였지만, 고종은 선동죄를 적용하여 이들을 10년간 유배보냈다.

 

이러자 독립협회는 특별회와 토론회를 잇달아 열어 정부의 횡포를 거세게 규탄하고 항의 편지를 보내는 등 투쟁을 벌였다. 결국 6월 28일에 고종은 유배된 죄인 지석영 등 4명을 특별 방송(放送)했다.

 

이윽고 고종과 수구파 정부는 독립협회 지도자 서재필(1864∽1951)을 1898년 5월 14일에 추방했다. 1895년 12월 26일에 귀국한 지 2년 5개월 만이었다. 1896년 4월 7일에 ‘독립신문’을 창간한 서재필은 초반에는 정부에 매우 협조적이었다. 이후 서재필은 정부의 무능과 부패를 고발하고 열강의 이권 침탈을 규탄했다.

 

부패사례를 살펴보자. 1896년 9월 17일 자 ‘독립신문’ 논설에는 내부대신이 새로 임명된 거창군수 김봉수를 만나 “어떻게 자네가 고을 원님이 되었느냐?”고 물으니까 “돈 3만냥을 주고 고을 원님 벼슬을 샀다”고 대답했다가 파면됐다는 기사가 실려 있다.

 

정부 비판이 거세지자 고종은 서재필을 못마땅하게 생각했고 1897년 12월 13일에 외부대신 조병식은 주한미국 공사 알렌과 담판했다. 그는 알렌에게 정부를 비난하는 서재필은 한국을 떠나야 한다고 말했다.


이러자 알렌은 서재필이 미국인임을 강조하고 중추원 고문 계약기간 10년 중 남은 기간의 급료와 미국으로 돌아갈 여비를 지급하지 않고는 해고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후 러시아 공사 스페에르는 서재필을 추방하라고 고종에게 압박을 가했고, 일본도 서재필 추방에 러시아와 공동보조를 취했다.

 

1898년 4월 25일에 서재필과 정부 사이의 교섭이 미국 공사 알렌의 주선으로 타결됐다. 정부는 서재필 출국 조건으로 서재필과 계약한 10년 중 잔여기간 7년 10개월의 급여 등을 지급하기로 합의한 것이다.

 

5월 14일에 서재필은 미국인 부인과 맏딸을 데리고 용산에서 배를 타고 인천을 거쳐 미국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서재필은 떠났어도 독립협회 활동은 결코 위축되지 않았다. 자주독립, 외세 배격, 민권 확립의 목소리는 더욱 거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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