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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은 강항의 역사적 현장을 직시(直視)해 보다!(대마도주 답서 편)

귤지정(橘智正 쓰시마(對馬島) 사신 다치바나 도모마사)등은 지금 곧 보내노라. (차마)할 말을 다하지 못한다.
등록날짜 [ 2021년10월19일 10시12분 ]

예조의 명에 따라 대마도주에게 답하는 글(원문 해석)

[辛丑 辛丑 : 宣親 34년(1601년)년 가을에 이상국덕형(李相國德馨) 李德馨(1561-1613) : 조선조 14대 선조 때의 대신, 자 명보(明甫), 호 한음(漢陰), 쌍송(雙松), 포옹산인(抱雍散人), 시호 문익(文翼)과 개부의남공(開府議男公)이 相國의 격문으로 군영에 있는 첨사僉使를 불러서 가자 相國이 답서를 초안 잡으라고 했다.]

 

사절(신사 信使)이 계속해서 이르고 성의가 갖추어졌으니 진실로 감탄할 만하다. 지난해의 회답하여 보고한 바도 이미 잘 살폈노라. 다만 우리나라가 貴島를 대우해 주기를 지극히 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귀도가 우리나라를 배신함이 너무나도 심하다.


왜냐면 우리가 개국한 이후 2백년 이래로 貴國과 대대로 선린과 우호를 돈독히 하여 귀도를 보기를 우리나라 땅과 같이 하여 使者가 오면 관사를 주어 자기 집에 돌아가듯 편하게 해주었고 고을의 창고에서 下賜한 것도 그 비용에 인색하지 않았었다.


그리고 그대들의 몸도 2품의 높은 秩祿을 올려 주어 임금의 은총을 베풀어 줌이 지극했고 사신을 모시고 온 종들까지도 모두 관직과 봉록을 얻어먹었으니 귀 섬 안의 하나의 초목이나 하나의 조그마한 동물에 까지도 어느 것이 우리나라가 길러주지 않은 것이 있는가.


그런데 지난 기축(己丑 : 1589)에 그대들이 사람을 보내와 말하기를 [關白 : 옛날 日本에서 天皇을 보좌하여 천하를 다스리던 직. 이 새로 섰으니 사신을 보내 맹약을 맺도록 하시오]하므로 우리 조정이 오직 그대(종의지(宗義智)만을 믿고 곧 두 세 명의 지위 높은 신하를 보내 멀리 험한 바다를 건너가 맹서를 한곳(息壤) 식양(息壤 : 식토(息土끊임없이 증식해가는 땅의 괴물.)이 그곳에 있는 데 입줄(九舌)이 마르기도 전에 명나라 사신의 행차가 저녁에 돌아오자 임진란에 군사가 아침에 이르러 부산(釜山)이 무너졌을 때에 그대(종의지(宗義智)가 선봉이 되었고, 京城을 향하는 길에 그대(종의지(宗義智)가 길잡이가 되었으며 이미 경성에 들어가서는 또 행장(行長) : 고니시유기나가(小西行長), 武將, 도요또미 히데요시(풍신수길 : 1536-1598)밑에서 戰功을 세워 24만석의 영주가 됨. 1592년 임진왜란 때 가토(가등청정(加藤淸正 : 가토 기요마사)를 달래어 멀리 平壤을 공격하게 함으로써 3경(三京)이 잿더미가 되고 7도(七道)가 빈터가 되었으니 은덕을 저버리기를 이렇게 까지 한단(할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남쪽변방으로 물러간 뒤에는 또 말하기를 [명나라 조정이 만일 책봉(冊封)을 해주고 조선이 만일 화친을 한다면 머물러 있는 왜군병사를 한꺼번에 물러나 돌아가겠다]하므로 天子는 넓은 천지의 도량으로 넓고 큰 임금의 은혜를 드리워 흉허물을 씻고 일본의 스스로 새로워지려 함을 허락하여 冊使 楊沈이 천자의명을 받들고 바다를 건너갔으며 우리나라의 사신도 뒤 따라 갔다.


(그렇게 정성을 다해줬음에도 불구하고)그대(종의지(宗義智)가 남쪽변방의 모든 왜들을 시켜 거짓 물러난 척하고 水軍을 엿살피게 한 뒤에 방비가 없음을 좋은 핑계로 여겨 冊封使가 아침에 돌아오자 정유(丁酉 : 1597)년의 군사가 저녁에 또 건너와 三路를 분탕을 치고 노략질을 하였다. 그러다가 힘이 모자라자 물러나서 그대는 남해바다에 군사를 머물러 웅거하고 行長은 가까이 順天에 머물러 전과 같은 비위 맞는 말을 하면서 독침을 한꺼번에 쏘았으니 예속된 나라(대마도)의 도리로써 이럴 수 있는가.


은덕을 원한으로 갚는 것도 너무했도다.

그리고 무술(戊戌, 1598)년 철수해 돌아간 뒤에도 또 그 버릇을 고치지 못하고 살며시 輕船을 보내 바다에 출몰하여 (경남)巨濟등 지역의 변방백성을 여러 번 잡아가 변방수비의 虛實이나 명나라 군사(天兵)의 유무를 물은 뒤에 돌려보내고 하였으니 만일 명나라 군대가 돌아가 버리고 변방의 수비가 비어 있었다면 그대는 또 다시 무슨 짓을 하려는 것이었는가.


원한을 풀겠다면서 먼저 간사한 짓을 하였으니 좌우에서 그대를 위하여 계략을 거들어 준 사람들도 잘못한 것이다. 설사 나라가 통신사를 보내지 않았다거나 명나라 조정에서 冊封使를 보내지 않았다 하더라도 貴國이 우리나라를 해치는 꾀가 壬辰, 丁酉란 보다 어떻게 더할 수 있겠는가.


關伯(풍신수길)이 우리나라에 군사를 내보낸 것은 참으로 貴島가 막을 수 있는 일이 아니란 것이나 우리나라를 해치고 재앙이나 환란을 끼친 것도 꼭 귀도에서 모두 한 짓이 아니란 것은 사실이기는 하다. 다만 앞뒤의 말이 모두가 속임수였으니 앞으로의 말을 어떻게 깊이 믿을 수 있겠는가.


그대(종의지)도 생각을 좀 해보라. 정말 이런 일이 없으리라고 보는가. 예나 이제나 천하에 강하고 약함이 어찌 떳떳한 것인가. 흉노匈奴의 묵돌선우(冒頓單于 : 漢初의 匈奴의 유명한 單于.유방의 본대가 흉노匈奴의 묵돌선우冒頓單于의 속임수에 넘어가 평성平城에서 포위됐을 때를 비유했다.)


이 활 잘 쏘는 사람 40만 명을 두고 군사와 말의 강함을 믿어 중국의 약함을 타서 高帝를 白登城에서 7일이나 호위했지만 백 년이 못 되어 묵돌선우(冒頓單于:匈奴)가 자기네 군주가 冠帶를 갖추고 渭上의 한나라 조정에 임금을 뵈러갔고, 돌궐(튀르크(Türk) 한자)의 힐리(頡利)는 사막 수 천리를 웅거하여 부처 앞에서 맹서한 정(香水之情)을 버리고 새로 일어난 唐임을 핑계 삼아 渭水와 便橋에 두 번이나 침입을 했으나 10년도 지나지 못하여 목을 끌려 하급관리에 나아갔으니 漢高祖와 당태종은 능히 일순간에 굽혔지만 만세토록 길게 뻗어남을 얻은 것이요, 묵돌선우(冒頓單于:匈奴)과 頡利는 눈앞에서 통쾌함을 얻었겠지만 발꿈치를 돌리자마자 화를 취하였으니 지난 역사에 실려 있는 사실을 지금도 뚜렷이 볼 수 있다.


천지가 둘로 갈라져 열리면서부터 강역이 되었으니 우리는 그대들과 서로 합칠 수 있는 나라가 아니다. 한꺼번에 짓밟고 살육한 짓을 어찌 족히 장한 일이라 하겠는가. 성덕 있는 천자(聖天子)께서 우리나라를 살펴 생각하고 貴國을 왈칵 성을 내시어 잘 훈련된 군사 삼십 만 명을 삼십년을 기한으로 머물러 주둔하게 하시고 經理司가 京師에 주둔하며 4도둑(四都督)이 호남과 영남에 나뉘어 살면서 예악이며 정벌이 모조리 천자의 조정으로부터 나오고 있으니 강화여부는 실로 우리나라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더구나 귀국이 우리나라를 분탕치고 노략질한지가 거의 7년이 되므로 애비 잃은 자식과 지아비 잃은 처자가 나라 안에 가득 차있어 사람의 자식된 자라면은 모두가 [나는 일본과 하늘을 같이 볼 수 없는 원한이 있다]하고, 사람의 형제된 자라면 모두가 [나는 일본과 칼을 지니고 다니며 노리는 원수의 사이다]하고, 사람의 아비 된 자라면 모두가 [내 자식이 왜군에게 죽었다]하고, 사람의 남편된 자라면 모두가 [내 아내가 왜군에게 잡혀갔다 어찌 차마 일본과 화친을 하리요]하여 모든 사람이 같은 말을 하고 나와 뭇사람의 노여움을 범하기 어렵다.


집마다 무기나 갑옷을 감춰두고 사람마다 싸울 연습을 하고 있으니 나라를 두고 있는 사람은 다만 민심을 따라갈 따름이라. 민심이 이와 같으니 또한 어찌할 수 없다. 비록 그러나 성인(聖人)의 사람을 대함은 그 앞날을 봐 주는 것이요 지난 일을 따지려 들지 않은 것이며, 임금된 자는 이웃과 사귐에 그 착한 뜻을 허락해 주고 그 옛 일을 탓하지 않은 것이다.


귀국이 만일 참된 마음으로 화친을 바라고 귀도가 만일 얼굴을 고치고 귀순하여 항복 한다면 우리나라는 마땅히 아주 자질구레한 변변치 못한 사물을 버리고 옛적 못된 행세와 앞날의 허물을 모조리 버리고 부산釜山의 통로를 예전과 같이 할 수 있다.


그리고 通信使(通信使 : 일본의 아시카가(足利) 막부때부터 도꾸가와(德川)막부 등에 보내는 조선왕조의 사신.)를 보내는 일은 성덕이 높은 천자의 분부를 얻지 않고는 안 된다.


정몽주(鄭夢周, 1337~1392) 鄭夢周, 1337~1392 : 고려 말의 충신, 유학자, 호는 포은)가 간일은 고려시대에 있었고 조선조에 들어서는 오직 신숙주(申叔舟, 1417~1475) 申叔舟, 1417~1475 : 조선 4대 세종 때의 문신, 자는 범옹(泛翁), 호는 보한재(保閑齋) 또는 희현당(希賢堂), 시호는 문충(文忠)가 한번 갔을 뿐으로 두 나라가 틈이 없었는데 기축(己丑 : 1589)으로부터 병신(丙申 : 1596)에 이르는 10년도 못되는 사이에 통신사가 두 번이나 가자 전쟁의 재난이 두 번이나 얽혔으니 통신사는 보낼 것이 아닐 뿐 아니라 또한 보내고 싶지도 않다.


귤지정(橘智正 쓰시마(對馬島) 사신 다치바나 도모마사)등은 지금 곧 보내노라. (차마)할 말을 다하지 못한다.




‘상국(相國) 이덕형(李德馨)과 조선 통신사

수은 선생의‘대마도주에게 답하는 글’은 당시 조선의 실상과 조정의 분위기를 파악할 수 있는 귀중한 사료적 가치로도 소중한 문서이다. 수은 선생을 아끼고 국사를 함께 하려고 한 이덕형은 1603년 대마도정벌을 선조에게 건의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이듬 해 영의정에 올랐는데 아마도 이 글은 1604년 무렵 작성되어진 걸로 보인다.[네이버 지식백과] 이덕형 [李德馨]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당시의 조정의 분위기를 잘 살펴 볼 수 있는 시 한편을 소개한다. 조선통신사는 1596년에 왜국을 다녀온 이후 무려 11년만인 1607년(선조 40년) 정사(正使) 여우길(呂祐吉, 부사 경섬(慶暹)ㆍ정호관(丁好寬)이 회답겸쇄환사(回答兼刷還使)가 되어 왜국에 가게 되자, 참판 윤안성(尹安性)은 절규하듯 시를 지어 전송하였다.(아마 윤 참판은 임진, 정유재란의 폐해를 너무도 잘 알기에 방비책을 주장한 인물로‘二陵松栢不生枝’파헤쳐진 두 릉의 참상(慘狀)을 비유해 회답사의 길을 반대하고 있다)

 

회답사라 명하여 어디로 간단 말이더냐 / 使名回答去何之
오늘 이 화친의 의미를 모르겠구나. / 此日和親意未知
한강을 응시해 위를 바라보라 / 試向漢江江上望
두 능 송백 가지마져 돋지 못했노라 / 二陵松栢不生枝



‘대마도주에게 답하는 글’과 수은선생의 심경 엿보기

‘대마도주에게 답하는 글’에서 일부 내용을 발췌해 수은 선생의 속마음과 조정을 대신해 고뇌에 찬 글을 써 내려감을 들여 다 보기로 한다. ‘우리가 개국한 이후 2백년 이래로 貴國과 대대로 선린과 우호를 돈독히 하여 귀도를 보기를 우리나라 땅과 같이 하여 使者가 오면 관사를 주어 자기 집에 돌아가듯 편하게 해주었고 고을의 창고에서 下賜(하사)한 것도 그 비용에 인색하지 않았었다.’


선생의 좌우명인 ‘유성약 천성부’를 실천의 원칙으로 삼고 구차하게 말하지 않고 성선의 배품을 말하고만 있다, 그럼에도 너희들은 어찌 사람으로서 한 국가를 운영하면서 이러하단 말이내를 직시한다.

 

‘그대(종의지(宗義智)가 남쪽변방의 모든 왜들을 시켜 거짓 물러난 척하고 水軍을 엿살피게 한 뒤에 방비가 없음을 좋은 핑계로 여겨 冊封使가 아침에 돌아오자 정유(丁酉 : 1597)년의 군사가 저녁에 또 건너와 三路를 분탕을 치고 노략질을 하였다. 그러다가 힘이 모자라자 물러나서 그대는 남해바다에 군사를 머물러 웅거하고 행장(小西行長)은 가까이 順天에 머물러 전과 같은 비위 맞는 말을 하면서 독침을 한꺼번에 쏘았으니 예속된 나라(대마도)의 도리로써 이럴 수 있는가.’


이 문장에서는 대마도주인 종의지(宗義智)의 성격을 환히 읽고 있다. 어쩌면 풍신수길과 맞먹는 성격의 소유자이다. 교활하고 여비하고 상대가 조금이라도 약하게 보이면 쳐들어와 노략질을 하고 다시 힘이 부치면 도망가는 성격을 노출시키고 있다. 특히 이 답서를 받는 종의지가 놀라 기겁할 정도로 정확하게 소서행장(小西行長)과 붙어서 아첨하는 모습이 눈에 선하듯 그리고 있다.

 

‘귀국이 우리나라를 분탕치고 노략질한지가 거의 7년이 되므로 애비 잃은 자식과 지아비 잃은 처자가 나라 안에 가득 차있어 사람의 자식된 자라면 모두가 [나는 일본과 하늘을 같이 볼 수 없는 원한이 있다]하고, 사람의 형제된 자라면 모두가 [나는 일본과 칼을 지니고 다니며 노리는 원수의 사이다]하고, 사람의 아비 된 자라면 모두가 [내 자식이 왜군에게 죽었다]하고, 사람의 남편된 자라면 모두가 [내 아내가 왜군에게 잡혀갔다 어찌 차마 일본과 화친을 하리요]하여 모든 사람이 같은 말을 하고 나와 뭇사람의 노여움을 범하기 어렵다.’


당시 정유재란의 폐해를 말하면서 왜와 철천지원수가 되었음이 이 답서를 원하는 바로 종의지(宗義智)라고 직설적으로 말하며 간담이 서늘할 만큼 조목조목 조선인의 뼈에 사무친 원한관계를 들어 그 죄를 묻듯 사실 그대로 직시해 답서를 작성했다.

 

‘성인(聖人)의 사람을 대함은 그 앞날을 봐 주는 것이요 지난 일을 따지려 들지 않은 것이며, 임금된 자는 이웃과 사귐에 그 착한 뜻을 허락해 주고 그 옛 일을 탓하지 않은 것이다. 귀국이 만일 참된 마음으로 화친을 바라고 귀도가 만일 얼굴을 고치고 귀순하여 항복 한다면 우리나라는 마땅히 아주 자질구레한 변변치 못한 사물을 버리고 옛적 못된 행세와 앞날의 허물을 모조리 버리고 부산釜山의 통로를 예전과 같이 할 수 있다.’


이미 조선은 성인(聖人)의 인격으로 지금까지 언급했던 사실들을 역사에 묻고 그나마 대마도주인 종의지로 부터 항복을 받아내겠다는 칼보다 무서운 말로 마치 철없고 무식해 마구 날뛰었던 자였지만 대마도를 위해 부산을 열어 먹고 사는 길을 열어 주겠노라고 엄중하게 회유하고 있다.

 

‘기축(己丑 : 1589)으로부터 병신(丙申 : 1596)에 이르는 10년도 못되는 사이에 통신사가 두 번이나 가자 전쟁의 재난이 두 번이나 얽혔으니 통신사는 보낼 것이 아닐 뿐 아니라 또한 보내고 싶지도 않다.’


여기에 또 다륹 조선통신사의 역사가 보인다. 1589년~1596년(8년)동안 통신사가 왜국에 두 차례나 행차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돌아온 건 두 번의 전쟁이었으니 어찌 두 번 다시 통신사를 보내고 싶겠느냐는 뜻으로 이미 왜와 소통이 어려운 너희 대마도만이라도 항복하면 내부전쟁으로 항상 시끄러운 왜국에서 벗어나 조용히 잘 살게 해 주겠다는 답서로 스케일이 광대하고 대마도주에게는 간담이 서늘할 만큼의 값진 답서라 할 수 있겠다.

 

수은 선생은 이처럼 왜국에 대한 조선의 온 백성들의 원한을 뼈에 사무치게 표현하면서도 절제하고 냉정하게 외교문서의 마무리를 맺는 부분은 위상을 갖춘 국가가 침략의 앞잡이 역할을 한 대마도주에게 당당하게 보낸 조선의 답신으로 기승전결(起承轉結)이 조금도 소홀함이 없는 훌륭한 답서라 생각되어 함께 읽어 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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