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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은 강항의 역사적 현장을 직시(直視)해 보다!(조고의 행장 편)

옥처럼 정정히 서서 먼지가 끼(이)지 않았으니 곧은 마음 볼 철에 피기를 부끄러워한다.
등록날짜 [ 2021년11월08일 10시16분 ]

◎조고(祖姑)의 행장, 마땅히 묘지의 위에 있어야 한다.
 

 
수은은 조고(祖姑)의 행장(行狀)을 기록하면서 가문(家門)을 한꺼번에 정리해 냈다. 물론 그 집안의 족보를 보면 적나라하게 보이는 것이나 420년 전에 국가가 알아주는 문인의 가문에 대한 기록이니 더 현실감으로 다가오지 않겠는가? 그러면 원문 해석된 글을 읽어보겠다.

조고의 행장의 산실 이흥서원(토요역사학교 진행모습)

公의 이름은 五福이요, 字는 元祜며 그 先世는 晉州人이다.

國子博士 啓庸이란 분이 있어 김방경(金方慶)의 왜군을 정복해 토벌하는 役을 돕고 돌아와서 冠을 걸어버리고 벼슬을 하지 않았는데 이분이 殿中內給事  引文을 낳고, 給事 공이 監察御史 師瞻을 낳았고, 御史 공인 晉原府院君 昌貴를 낳았고, 晋原 공이 文敬公 君寶를 낳았고 文敬公이 네 아들을 낳으니 筮, 籌, 기(?), 策이요, 모두 귀하게 출세했으니 기(?)는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가 되었다.

 

贊成공이 다섯 아들을 낳았으니, 淮백, 淮중, 淮순, 淮숙, 淮계요 모두 유명하였다. 淮伯이 지금 왕조에 들어와 東北面都巡問使가 되었는데 號가 通亭이요, 아들 다섯을 낳으니 宗德, 進德, 友德, 碩德, 順德이다. 碩德은 벼슬이 知敦寧에 이르고 諡號가 戴愍이며 號가 琓易齋다. 琓易공이 아들 셋을 낳으니 希顔, 希孟, 希曾이요.

 

希孟은 정묘시에 장원으로 합격하였고 두 번이나 錄勳을 하여 翊戴佐理功臣 晋山君이 되고 벼슬이 議政府左贊成에 이르렀고 諡號는 文良이다. 아들 肅憲의 공훈으로 領議政을 贈職 받았고 두 아들을 낳았는데 큰아들을 龜孫이니 벼슬이 議政府左議政에 이르렀으니 바로 숙헌 공이다.


다음은 鶴孫이니 벼슬이 掌隷院司評에 그치고 惠文에 抵觸하여 영광군으로 귀양을 왔으니 그 자손이 그대로 집을 정하고 살았다. 아들 여덟과 두 딸을 낳았다. 그 둘째가 享壽니 나이 28세에 상의원의 別堤로서 외삼촌 申政丞 用漑를 따라 燕京을 가다가 도중에서 죽었다. 이분이 실로 公(處士公 五福)을 낳았다.

 

공(處士公 五福)은 이를 갈 무렵(유년기)에 부친을 잃었으므로 司評공이 오래 살지 못할까 염려하여 文墨을 가르치려고 힘쓰지 않았는데 장성하자 진실하고 기개가 있어 향리가 모두 善人이라고 칭하였다.

 

梁氏를 娶하였으니 耽羅星主의 후손이다. 조부는 虞候 約이요. 아버지(考)는 敎授 碩鼎이다. 아들 일곱과 딸 둘을 낳았으니 큰아들은 克溫이니 두 아들 源과 淵을 낳아서 연은 乙酉의 司馬試에 합격했다.


다음은 克良이니 세 아들 灝, 洪, 잠(?)을 낳았는데 洪은 신묘년의 무과에 급제하여 內簷寺主簿가 되었다. 다음은 克恭이니 한 아들 洞에 낳아 司宰監參奉이 되었다. 다음은 克儉이니 아들 다섯인데 薤·濬·渙·沆·泳을 낳았다.

 

해는 무자(1588)의 사마시에 합격하고 항은 무자(1588)의 사마시에 합격했으며 갑오(1594) 정시에 합격했다. 영은 계축(1613)의 사마시에 합격했다. 다음은 克讓이니 후손이 없었고 다음은 克忠이니 한 아들 浹을 낳아 甲午의 무과에 합격하여 興陽縣監이 되었다.


다음은 克孝니 아들 넷을 두었는데 洙·泗·濂·洛을 낳아 수는 갑오의 무과에 합격을 했고, 염은 계사의 무과에 합격했다. 큰딸은 察訪 李宏中에게 시집가서 세 아들 侹·유(?)·偉를 낳았고, 다음은 忠順衛 李琚에게 (시집)가 아들 하나인데 山斗이다.


선생은 享年이 62살이니 司評공으로부터 公에게 이르기까지 3세가 벼슬도 드러나지 못했고 나이도 많지 못하였으니 슬프도다.

 

‘조고(祖姑)의 행장’과 수은선생 심경(心境)

‘해(薤)는 무자(1588)의 사마시에 합격하고 항은 무자(1588)의 사마시에 합격했으며 갑오(1594) 정시에 합격했다. 영은 계축(1613)의 사마시에 합격했다.’ 저어당이신 강해(姜薤)가 신묘사화에 연류(連類)되어 죽자 저어당 강해(姜瀣)로 한자 이름이 바뀌고 만다. 역사란 사건에 의해 직시되는 현상을 이렇게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다음은 克孝니 아들 넷을 두었는데 洙·泗·濂·洛을 낳아 수는 갑오의 무과에 합격을 했고, 염은 계사의 무과에 합격했다.’ 수은 선생과 의병장을 함께했으며 사촌의 형제 우애(友愛)를 뽐냈던 관계의 인물이 만은공 강락(姜洛)이시다.

(11세 別提公 亨壽, 12세 處士公 五福, 13세 碧流亭公 克孝 14세 晩隱公 洛, 15세 時亮)



사사롭게는 필자의 직계 11대 조부(祖父)가 되시는 분이기도 하다. 영광 불갑면 복호(伏虎)산에 터를 잡아 복호문중(또는 만은공 문중)이라고도 한다. 맹수의 왕인 백호(白虎)가 넙죽 엎드려 있는 형국의 터에 앞부분인 발과 얼굴부분을 영광군에서 매입하여 행복마을 100세대를 짓기도 전에 100% 분양을 완료했다고는 하나 2017년 초 무렵 문중의 반발과 원성은 자자했다. 


 영광군 행복마을 사업과 복호문중 입장

그도 그럴 것이 백호(白虎)의 앞다리부분을 행복마을이라는 미명(美名)아래 잘라내 버리는 것이기에 문중어른인 대욱 종회장으로서는 쉽게 동의하기가 어려웠다. 하물며 문중의 수장으로서 사적(私的)인 감정으로 수용하기가 매우 난처하고 아주 어려운 결정이었으리라 싶다.


사실 이 행복마을의 초안을 잡은 사람이 수은강항선생 기념사업회 강지원 (변호사, 매니페스토 실천가)상임고문이다. 강 변호사는 수은공의 직손으로 2017년 초 당시 서울역 2층 커피숍에서 백인철 탈랜트와 일행들을 만나 두어 차례 회동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백인철 탈랜트는 예술인촌을 영광군에 건립했으면 좋겠다고 먼저 의견을 냈다. 이어 강지원 변호사와 함께 전남도청에서 이낙연 당시 전남도지사를 만나「간양록」에 버금가는 수은강항선생의 영화제작사업과 예술인촌 건립계획에 대한 제안을 했던 것이다.


이후 영광에 내려온 강지원 변호사는 김 모 영광군수를 만나 배산임수(背山臨水)로 불갑 저수지를 바라보고 예술인 마을 건립과 영화제작을 제안했었다. 그런데 당시 초선인 영광군수는 예술인촌에 대해서는 묵묵부답이었고 전남도지사의 명에 따라 노00 문화관광과장과 함께 영광군수를 만나 건의했던 수은선생의 영화제작만큼은‘두 달여의 시간을 달라’고 김 군수는 답을 했고 이후 끝내 실행에 옮기지 못했음에 지금까지도 안타까움이 크다.


그러나 뜻하지 않게도 예술인촌인 예술인 마을 대신에 행복마을을 영광군차원에서 건립한다고 하니 강지원 변호사가 농담반 진담반으로‘우리가 창안했던 것을 군이 도용해 가로채갔지 않느냐’는 말을 어필했던 기억이 새롭다.


아무튼 당시 행복마을 건립지로 복호문중의 임야를 매입하겠노라고 영광군에서 복호문중의 새 임원진에게 통보를 해 왔고 가장 반대 의견을 표명한 사람이 당시 복호문중의 종회장인 강대욱 만은공 종회장이었다.


임원회의에서 종원들이 과반수 이상 매도할 것을 종용하고 나오자 강대욱(광주 향교 전교 역임)종회장은 흡사 돈에 눈이 어두워 문중 땅을 팔아먹는 꼴이라며‘자네(필자)가 앞장서서 문중 땅을 팔아먹으려하는 일가들을 막아줘야겠네’라며 당시 광주향교에서 위임장까지 즉석에서 작성해 줬다.


이에 대욱 종회장을 대리해서‘영광군 복호문중 땅 매매 불가’의 내용증명을 전남도청과 영광군청에 각각 보냈다. 그런데 전남도청에서는 그럴듯하게 답변공문이 먼저 도착해 왔다. 영광군의 복호문중 땅 관련한 사안은 전남도와 전혀 무관하니 영광군과 의논해 잘 처리하라는 식의 내용이었다.


이후 영광군 건축과 담당직원과 수차례 통화를 했고 문중에서 1명이라도 반대의사를 표명하면 이전절차가 쉽지 않다는 답변도 들었다. 그렇게 줄다리기를 하고 있을 무렵 강 모 의장으로부터 3-4차례 만나자는 전화를 받고도 필자는 약속을 미루는 상황이었다.


그러다가 2017년 4월경에 강 의장을 만나 영광군의 확고한 행복마을 건립사업과 이미 되돌릴 수 없을 만큼 사업이 진행되고 있는 영광군과 문중의 새 집행부의 흐름에 대해 자세한 설명이 있었다.


강 의장의 충분한 설명으로 도저히 행복마을 건립사업에 더 이상 역행하기가 어려워 적극 협조하기로 결정하고 강대욱 종회장에게 반대파들의 의견까지 자세히 보고 드리기로 결심을 굳혔다.


모든 게 그렇게 순조롭게 정리가 되는 걸로 알았는데 2017년 5월 4일 2시 영광군수 면담을 미리 신청 접수해 일정을 잡아 탁인석 위원장, 한하민 광주시 의사국장, 강대석 박사와 영광태권도협회 조영기 회장과 영광군수를 만나게 되었다.


당시 탁인석 기념사업회 추진위원장과 함께 군수실에서 막 회의를 시작하려는데 김 군수가 회의에 들어가기에 앞서 대뜸 큰소리로‘왜 군차원에서 추진하는 사업에 모함을 하느냐’며 일방적으로 필자에게 발언을 마구 쏟아 내 3분만 발언 기회를 달라고 3-4차례 요구해 말미에 겨우 위와 같은 내용으로 진실을 해명할 수 있었다.


필자는 그 날 경위를 설명하기를 그렇잖아도 연초부터‘강 의장께서 한 번 만나자고 해 복호문중 땅 매매 불가 건에 대해 강력하게 말했으나 군차원의 행복마을 건립이라고 하면서 대세를 따라 주라는 말에 필자는 그러면 명분(名分)을 달라면서 최종적으로 의견을 수렴하기로 했다.’면서 강대욱 종회장에게 충분히 설명드렸으나 여전히 불편해 하신다며 자세한 상황을 설명했었다.


군수면담을 마치고 일행과 함께 곧 바로 강 의장을 찾아 가 왜 군수가 다수가 있는 면전에서 불명예스럽게 역정을 쏟아내는 이유를 모르겠다고 항변하기도 했던 기억이 지금도 뚜렷하게 기억난다.


사람인심이 그렇다는 걸 또 느낀 건 당시 함께 참석한 한 위원의 한마디가 지금도 뼈에 비수처럼 박혀있다.‘군수님! 강대의의 잘못이라면 오늘 이 자리에 저는 참석하지 않았을 겁니다.’하며 농반 진반으로 말하면서 면담 후에 따로 뭔가 주고받는 귓속말이 지금도 잊혀 지지 않고 그 다음 면담 대기 순서에는 강대욱 종회장 뒤를 이은 차기 만은공 종회장과 총무, 임원진들이 비서실 쇼파에서 기다리고 있음에 당시 문중의 아픔이 외부로 노출되는 것 같아 허탈 그 자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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