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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강항로드(ROAD) 탐방에 올라

고난과 치욕의 길을 넘어 보람과 영광의 길로 들어서며
등록날짜 [ 2022년12월25일 11시17분 ]
 <글을 연재하며...>
본 기행문은 2022년 11월 15일~19일(4박 5일)까지 전국적으로 강항로드(ROAD) 탐방단을 구성해 부산 김해공항에서 후쿠오카공항을 거쳐 일본내 강항선생의 유적지를 탐방한 글로 소소한 일상까지 깨알같이 담아 국민들에게 소소한 즐거움과 역사적 현장을 직시하고자 했던 탐방단의 의지를 전달하고자 했음을 먼저 밝히는 바이다.
 
 떠남에 앞서
 평소 여행은 새로워야 한다는 생각을 항상 가지고 있다. 따라서 장소도, 함께하는 사람도 새로워야 여행의 참맛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고 본다. 새로운 것을 보고 들어야 사고의 폭이 넓어지고, 새로운 사람과 교류해야 세상을 보는 시각이 다양해지기 때문이다. 
 그간 필자가 한 여행은 주로 보고 즐기는 데 있었다. 직장 동료, 친구들과 함께하며 명승지 찾아 즐기고, 먹고 마시는 게 위주였다. 그래서인지 대부분 여행을 다녀왔어도 별반 남는 게 없었다. 그저 우르르 몰려다니며 주마간산(走馬看山)식 여행이 되다 보니 피로만 쌓일 뿐이었다. 
 
 그러다가 여행 패턴이 바뀐 건 퇴직을 하고서다. 종사(宗嗣)에 참여하고, 향토 문화 연구 활동하다 보니 자연스레 즐기는 여행에서 탐구 여행으로 바뀌게 되었다. 기행문을 쓰고, 조사보고서를 써야 하니 자세히 보고, 듣고, 생각하는, 즉 음미하는 여행이 되었다. 

 수은 강항 선생!
 일찍이 선조 문집을 살피다 뵙게 된 선생은 일본 유교(성리학, 유학)의 비조(鼻祖)요, 지조 높은 선비로 추앙받는 분이다. 
 
 강항 선생은 필자의 14대조이신 팔송 윤황 선생과 우계 성혼 문하에서 함께 학문을 갈고 닦았다. 훗날 영광군수로 나가 서서는 마침 고향에서 후학을 지도하던 강항 문하에 두 아들을 들게 했다. 
 
 윤황의 차자로 13대조이신 동토 윤순거 선생은, 수은 강항 선생의 아주 특별한 제자라고 본다. 윤순거는 스승 강항의 일본 포로 생활기를 엮은 ‘간양록’을 편찬했다. 스승 강항이 주희의 저서를 보완해 서문을 쓰고 내용을 요약한 ‘강감회요서’와 선생의 일생을 정리한 ‘수은 강공 행장’을 지어 간행했다. 
 
 지금 영광의 내산서원엔 강항 선생과 함께 윤순거 선생도 모셔져 있다. 1609년 사제의 연을 맺은 후 400여 년이 넘는 오랜 세월 아름다운 사은(謝恩)의 표상이 되고 있다. 
 
 필자는 파평 윤씨 노성 종중 맏이인 동토 후손 즉 장파 종중의 중책을 맡은 사람으로서 위선사(爲先事)에 관심을 두지 않을 수 없었다. 동토의 발자취를 찾는 활동을 하면서 수은 선생에 관한 공부도 함께 하게 되었다. 영광 내산서원 제향에 참여해 높은 뜻을 기렸고, 유물 전시관에서 동토 관련 자료를 보고 가슴 설레는 순간도 맛보았다. 
 
 또, 윤순거 선생이 지은 ‘수은 강공 행장’을 읽으니 수은 선생의 활약상이 머릿속에 정리되었다. 
 
 한창 감수성 예민한 어린 제자를 받아들여 참 교육시킨 수은 강항. 스승의 가르침을 평생 가슴에 담고, 입은 은공을 저버리지 않으려 노력한 동토 윤순거. 두 분의 아름다운 인연이 정말 소중하게 생각되었다. 
 
 21세기 들어 물질적 풍요는 누리지만, 정신적 빈곤으로 사회 전반에 걸쳐 각종 병리 현상이 표출되는바, 강항의 우국충정과 윤순거의 사은(謝恩) 정신이 절실히 요구된다고 보겠다. 포로 신분으로 행동의 제약이 극심한 상황에서도, 상소를 세 사람을 통해 올린 강항의 의로운 행동을 교훈으로 삼아야겠다. 스승의 의로움을 널리 알리려 스승의 저서를 편찬한 윤순거의 스승 공경심도 아로 새겨야겠다.
 
 일본 시코쿠 에히메현 오즈시 시민회관 앞, 그 자리에 ‘홍유 강항 현창비’ 있다는 이야기 진즉 들었으나, 직접 찾을 기회를 얻지 못해 안타까움이 실로 컸다.  그러던 중 기회가 찾아왔다. 지난 2022년 6월 18일 수은강항선생 기념사업회 관계자 네 분(4명)이 파평 윤씨 종학당을 깜짝 방문한 것이다. 
 
당시 서울에 있던 필자는 연락을 받고 급히 논산으로 내려가 손님을 맞이했다. 파평 윤씨 노성 종중 내력(來歷)과 사적(事績)을 안내했다. 답사가 끝나고 오찬 자리에서, 올해 안에 ‘강항로드(ROAD)’ 탐방 계획이 있다는 이야기 듣고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각종 자료 탐색을 통해 강항 선생의 일본 생활에 대한 지식을 시나브로 쌓았다. 여행안내 프로그램을 보고 나름대로 탐구 시 착안 사항을 미리 정리도 해 놓았다. 

 정말 찾고 싶고, 보고 싶은 ‘홍유 강항 현창비’!
 거기 현창비 하단 수은 연보에 제자 윤순거가 ‘간양록’과 ‘수은집’을 간행했다는 기록 있어, 이미 사진을 통해 확인했기에 설레는 마음이 더욱 컸다. 
 
 인천 김포공항이 아닌 부산 김해 공항에서 출발하는 비행기를 타야 하기에, 주로 서울 생활을 하는 필자로선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그러나 그 정도는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다.

오랜 바람이 이루어진다는 기대감이 더 커서다. 출발 전날 부산에 내려가 숙박하기로 일찌감치 마음을 먹고, 11월 14일을 기다렸다. 흡사 초등학생이 설레는 마음으로 수학여행을 기다리는 것처럼 말이다. 
 
 출발 전야
 2022년 11월 14일 날이 밝았다. 아침도 거른 채 미리 꾸려놓은 캐리어를 끌고 시내버스로 서울역에 가 9시 35분 발 부산행 KTX에 몸을 실었다. 
 
 3시간 가까운 시간이 소요되기에 최부의 ‘표해록’을 꺼내 읽으며 여유있게 시간을 보냈다. 많은 책 중에서 ‘금남 표해록’을 가져온 건, 강항과 최부 모두 조선의 관리로 본의 아니게 체험한 외국 생활기를 글로 남겼다는 공통점이 있어서다. 물론 수은과 금남의 처지는 달랐다.

수은은 왜에 피로인(被擄人)으로 끌려간 것이고, 금남은 바다에서 태풍을 만나 표류하다가 이국 땅에 상륙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바다에서 피로되거나, 표류를 해 왜에 머무른 점은 같았다. 거기에 그들이 남긴 글 모두 역사적으로 귀한 평가를 받기 그 뜻을 음미해보기 위해서였다. 
 
 12시 30분 조금 넘어 부산역에 도착한 나는 중국집에서 간단하게 점심을 때우고, 센텀시티 숙소로 향했다. 마침 부산에서 직장생활 하는 동생 있어, 거길 찾았다. 동생은 국회 출장이라 상경한 관계로 빈집에 짐을 내려놓고 해운대로 향했다. 평일 오후인데도 제법 많은 사람이 해변을 거닐고 있었다. 
 
 강항 선생이 왜로 끌려갈 때는 부산 땅을 밟지 않았다. 영광에서 순천을 거쳐 여수 안골포를 통해 왜로 들어갔기 때문이다. 3년 가까이 피로(被擄)에서 벗어나 귀환할 때는 대마도를 거쳐 거제도(두모포나 초량)로 상륙했다.

여기 해운대 해변에서 북쪽으로 이십 오 리 올라가면 두모포요, 남으로 이십오 리 내려가면 초량이다. 초량은 윤순거 장자로 내 12대조인 윤절이 접위관으로 근무하다 관아에서 생을 마감한 슬픈 현장이기도 하다. 
 
 강항 선생이 일본에서 38명을 쇄환해 돌아오며 조선의 거제도 땅에 첫 발을 디뎠을 때 과연 어떤 심정이었을까? 임금에 대한 죄스러움, 가족을 잃은 슬픔, 나라 위해 헌신하겠다는 다짐, 부국강병 대비책 등등으로 복잡한 심경이었을 것이다. 
 
 부산은 왜와 교통하는 관문이다. 신사유람단이 출국하고 귀국하는 관문이다. 일본 사신이 조선 땅을 처음으로 밟는 곳이다. 왜관을 설치해 무역 활동을 하도록 하였다. 특히 대마도는 조선과 무역을 하지 않으면 생존 자체가 불가능한 지역이었다. 하여 그들은 조선 정부에 조공을 바치면서 자유로운 무역 활동의 보장을 요구한 역사적인 곳이다. 
 
 해운대는 우리나라 대표적인 해수욕장이다. 경치가 아름다운 경승지로 많은 관광객이 찾고 있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우뚝 솟아있는 빌딩 숲을 보며, 영화에서 본 6‧25 한국동란의 참상을 떠올려보았다. 전쟁의 참화를 딛고 일어서 선진국 반열에 오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의 피와 땀이 있었겠는가? 
 
 우리는 역사에서 그 답을 찾아야 하겠다. 바로 수은 강항의 애국 충절의 정신에서 말이다. 동토 윤순거의 스승 공경하는 자세에서 말이다.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적중에서 상소문을 작성해 보내는 수은의 국가와 백성을 향한 충심, 만난(萬難)을 극복하며 스승에게 보은하고자 한 동토의 한결같은 마음. 이러한 정신이 하나 되어 근대에 와 한강의 기적을 이룬 민족성을 가진 게 우리 민족일 것이다. 
 
 땅거미가 지도록 해변을 거닐며, 내일부터 전개될 강항로드(ROAD) 탐방에 관한 생각을 정리했다. 과연 무엇을 얻어올 수 있을 것인가? 필자를 기다리는 건 무엇일까? 단순하게 일본은 나쁘다고 귀가 따갑도록 듣고 배워왔는데, 언제 까지나 그런 생각을 가지고 그들을 그렇게만 대해야 한단 말인가?

지구상에서 일본인처럼 검소하고, 친절한 민족은 없다는데 해방 80주년이 가까워져 오는데도 그들을 마냥 악마로만 여겨야 한단 말인가? 
 
 이러한 일본 강항로드(ROAD) 탐방을 두고 한 친구가 말했다.  “수은 선생이 왜에 끌려갈 때의 심정으로 강항 선생의 강항로드(ROAD) 탐방길을 잘 살피게나.”
 
 2022. 11. 15(화) 맑음
 김해공항- 후쿠오카 공항- 후쿠오카 타워- 모모치 해변- 큐슈 박물관- 다자이후 텐만궁- 쿠주고원 코티지(숙소)
 
 바뀐 잠자리와 미지의 세계에 대한 설렘으로 밤을 지새웠건만, 몸은 가볍고 기분은 상쾌했다. 좀 일찍 방을 나서 6시 30분 센텀시티역에서 2호선에 올랐다. 사상역에서 부산 김해 경전철로 갈아타 김해공항에 내리니 약속 시각보다 이른 7시 50분이었다. 광주에서 출발한 일행은 이미 도착했다는 소식이었다.

맨 꼴찌로 도착해 기다리는 강대의 탐방단장을 만나 필요한 입출국 서류 등을 받고 곧바로 출국 신고 후 출국장으로 나갔다. 
 
 출국장은 이미 만원이다. 코로나로 침체에서 벗어나 서서히 활기를 찾아가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일본과 중국 그리고 동남아 노선이 개설돼있는 김해 국제공항은 부산의 랜드마크로 자리한 지 오래다. 인천, 제주, 김포 공항에 이은 우리나라 제 4위의 공항으로 발전하는 부산을 상징하고 있다. 
 
 안면이 있는 강재원 내산서원 보존회 회장과 인사 나누고 대화했다. 대화 주제는 수은과 동토다. 사제지간의 아름다운 인연이 400년을 넘어 이어져 오고 있음을 자랑스러워하며, 후대에 까지 영원하길 염원했다. 또한 후손으로서 그 역할을 충실히 함이 도리라는 데도 의견을 모았다. 
 
 탑승을 기다리는 동안 여행객 모습을 살펴보았다. 대부분 관광여행 같아 보였다. 주로 단체 여행객이다. 코로나로 막혀있던 국제 항로가 열리니 너도나도 해외로 발길을 돌리는가 싶다. 한껏 들떠 너나나나 유쾌한 담소를 주고받는 모습이다. 물론 충분히 그들 틈에서 분위기에 취해 보았다. 
 
 9시 50분 후쿠오카행 Busan Air에 탑승했다. 창가 자리에 앉아 구름 위를 나는가 싶었는데 벌써 일본 땅이란다. 채 한 시간이 안 된 10시 40분 비행기는 후쿠오카 국제공항에 무사히 착륙했다. 후쿠오카는 큐슈에 있는 제법 큰 현이다.

주민 550만의 후쿠오카는 대륙문화를 받아들이는 관문 역할을 한 교통의 요지로 부산과는 직선거리로 200km 남짓이다. 일제 시대에 외종조께서 생활한 곳이라 어머니로부터 ‘복갱이’란 말을 자주 들었는데, 바로 복강(福岡)이 후쿠오카이다. 
 
 코로나로 인한 입국 절차가 퍽 까다로워 입국장을 빠져나오는 데 두 시간 가까이 걸렸다. 늦은 짐을 찾아 일행을 만나려고 하는데 도대체 행방을 짐작할 수가 없었다. 묻지 않고 찾아보려 노력했으나 허사였다.

마지막 수단으로 강대의 단장에게 전화하니 3층에서 버스가 기다린다는 거였다. 여행박사 가이드가 충분한 설명을 해주어야 하는데, 전혀 그런 말이 없어 한참을 방황했던 게다. 
 
 아침을 굶어 시장기가 극에 달했지만 참고 또 참으며 시내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쌀밥이 나왔는데 차지질 않았다. 5‧16을 경험한 후 당시 수입된 안남미(安南米) 같았다. 그렇지만 그렇게라도 식욕을 잠재우고 나니 살 것 같았다. 나름 기운이 솟아 주변을 둘러보면서 이국의 풍경을 머리에 담아두고픈 의욕이 생겼다. 
 
 일본에서의 첫 일정은 후쿠오카 타워 관광이었다. 모모치 해변 가까이에 있는 전체 길이 234m의 후쿠오카 타워는 1989년 아시아 태평양 박람회에 맞춰 세워졌다고 한다. 이 타워는 TV와 라디오의 방송시설이 들어가 있으며, 많은 사람이 찾는 명소임을 실감할 수 있었다. 우리가 엘리베이터 탑승을 기다릴 때 일본 초등학생들이 견학하는 모습도 눈에 띄었다. 
 
 우리 일행은 엘리베이터에 올라 주변을 조망하며 경치를 감상했다. 타워 자체는 여러 기능을 생각해 매우 과학적으로 설계되었다고 볼 수 있지만, 주변 경관이 우리의 남산타워에는 못 미친다는 생각이다. 해변 타워라지만, 우리나라 해상케이블카를 타고 감상하는 게 훨씬 더 멋스럽지 않을까 싶다. 
 
 해변 타워 가까이에 모모치 해변이 있었다. 하와이에서 모래를 가져다 만든 인공해변이란다. 해변을 인공으로 만들다니? 의문이 들었다. 그러나 여유로운 삶을 즐기려는 일본인들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고도 본다. 
 
 한 마디로 모모치 해변은 작은 규모의 해양 리조트다. 규모는 작지만, 유럽풍의 결혼식장, 바다를 바라보며 식사를 즐길 수 있는 노천 식당, 상점과 해양 레포츠 시설이 갖추어져 있단다.

우리는 직접 백사장을 걷지는 않고 둘러만 보았는데, 조용하고 깨끗하단 인상을 받았다. 사실 우리나라의 해수욕장은 성수기건 비수기건 널려있는 쓰레기를 쉽게 발견할 수 있는데 여긴 그런 게 전혀 눈에 띄지 않았다. 
 
 규슈 박물관을 견학했다. 2005년도에 개관한 국립박물관으로 웅장한 건물에 압도당했다. 과연 실제 내용도 충실할까? 우리나라 박물관과 어떤 차이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입장했다. 그런데 여기 일본도 경로 우대 제도가 있음을 알았다. 나 같은 고령자는 여권을 보여주니 입장료 없이 그냥 들어가란다. 
 
 일본은 도쿄, 교토, 나라, 규슈 등 네 개의 국립박물관이 있다고 한다. 규슈를 제외한 세 박물관은 모두 역사성을 고려해 고도에 위치하지만, 여기 후쿠오카는 조선과 중국의 문물을 받아들이는 창구 역할을 한 곳이기 뒤늦게 박물관 건립을 추진한 게 아닌가 한다. 
 
 각 전시실을 돌며 감상했다. 다행히 우리글 설명이 병기돼 있어 별다른 불편 없이 감상할 수 있었다. 전시품 중 눈에 확 들어오는 건 없었다. 우리같이 금관 등 금장식품이 없는 것도 아쉬움이었다. 나는 주로 우리나라에서 유출된 유물을 찾아 감상했다. 
 
 감상을 마치고 나오는데 ‘가야유물 특별전 개최’를 알리는 포스터가 눈에 들어와 무척 반가웠다. 일본 문화는 가야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게 사실이다. 그들은 ‘임나일본부설’이니 어쩌니 하며 역사를 왜곡하고, 자신들의 문화가 우월하다고 하지만, 모든 게 조작과 변조된 사실이란 것이 학계의 연구로 하나씩 밝혀지고 있다. 
 
 우리나라 국립중앙박물관과 일본 국립박물관이 상호 문화교류 차원에서 가야유물 특별전을 개최하는 것이다. 2023년 1월 24일부터 3월 19일까지 두 달 가까이 열리는 특별전은 일본인들에게 역사의 진실을 바로 보는 교육의 계기가 마련되길 바라면서 발길을 돌렸다. 
 
 일본은 신사(神社)의 나라다. 전국적으로 약 8만 5천여 개의 신사가 있다고 한다.

거기에 믿는 신도 많아 그 수를 헤아리기 힘들 정도라고 한다. 우리는 민속신앙에서 천신, 지신, 용왕신, 조왕신 외에 큰 나무나 바위, 호랑이 등 영험한 동물을 신으로 섬겼지만, 일본인들은 젓가락 신, 귤 신, 남근신 등 진짜 입에 담기도 부끄러운 것들 모두를 개의치않고  신으로 삼고 있단다. 
 
 마지막으로 찾은 다자이후 텐만궁은 후쿠오카 다지이시에 있는 신사로, 학문의 신인 스가와라노 미치자네를 모신 곳이다. 연 7백만 명의 참배객이 찾는다는 데서 이 신사의 일본 내 위치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학문의 신은 실존했던 인물로 자녀의 합격을 기원하는 부모가 많이 찾는다고 하니, 한국 일본 모두 자녀 교육 열기가 매우 뜨겁다는 생각이다. 
 
 신사와 관련한 전설과 특별한 사연이 있는 시설물이 있으나, 그보다는 신사 주변의 매화 동산과 녹나무 등 푸름을 유지하고 있는 노거수의 모습에 마음이 갔다. 한마디로 경이로웠다. 수백 년을 살아왔을 노거수들을 보며, 우리나라를 동아시아 최빈국에서 선진국 반열에 오르게 한 부모 세대 어르신들의 모습과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지진과 태풍을 이겨내며 푸름을 유지하고 있는 녹나무와, 평생 호밋자루 손에서 놓지 않고 논밭을 가꾸느라 등이 굽고 얼굴이 탄 우리 어르신들은 영원히 잊지 말아야 할 보물같은 자산들이다. 
 
 오늘의 숙소는 쿠주고원 코티지다. 십여 년 전에 둘째 딸 내외와 온천 여행을 와 머문 곳이다. 숙소는 고원 속에 있는 오래된 료칸 즉 일본의 전통적인 여관이다. 차로 오르는 데 주변 경치가 좋으나 밖이 어두워 감상치 못하고 숙소에 도착했다. 
 
 4박의 숙소를 함께 하게 될 분은 강남주 선생이셨다. 지정된 방에 짐을 풀고 간단히 인사를 나누고, 우선 식당에 가 저녁 식사부터 했다. 그리고 욕탕으로 가 뜨거운 온천수에 오랫동안 몸을 담갔다. 노천탕을 찾아 바깥바람을 쐬며 온천욕을 즐겼다. 
 
 우리가 묵을 방은 일본 전통 가옥 구조다. 이런 방은 몇 번 경험을 한 바여서 특별히 호기심이 일진 않았다. 하여 법원 공무원으로 퇴직한 강 선생과 오래도록 이야기를 나누었다. 강 선생은 다섯 살 위이신데 얼굴이 동안이고 아주 건강해 보이셨다. 역사 연구가로 등산이 취미라 했다. 히말라야 4천m 고지도 올랐단다. 우리는 밤이 깊어가는 줄도 모르고 자정까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강항 선생이 왜의 피로길에는 규슈 땅을 밟지는 않았다. 이끼 섬과 혼슈의 시모노세키 즉 하관을 거쳐 시코쿠로 들어가셨다. 작은 배로 거센 파도 헤치며 순천에서 오즈성까지 장장 달포동안을 해상(海上)에서 시달려야 했으니, 그 고통을 무어라 표현할 수 있을까?

본인의 의사와는 전혀 다르게 포로 신분으로, 또 가족들을 잃는 슬픔까지 겪으며 끌려왔으니 삶에 대한 의욕이 과연 있었을까?
 
 규슈는 선생을 보았으리라. 정유년에 조선 선비 하나 가족과 함께 시코쿠로 끌려가는걸. 규슈는 알았으리라. 정유년에 끌려온 조선 선비가 바로 일본 성리학의 비조 수은 강항 선생이란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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