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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강항로드(ROAD) 탐방에 올라 3편

“강항은 야쿠시다니(약사암) 계곡서 노승을 만나 배편을 알아봐 주겠다는 약속받고 내려오다 왜병에게 붙들렸다!!” 간양록 중
등록날짜 [ 2022년12월27일 10시03분 ]
  2022. 11. 17(목) 맑음  
  숙소- 출석사- 히지가와 해변- 야쿠시나니 계곡 탐방
 
 8시 30분 숙소를 출발해 강항 선생이 자주 찾았던 출석사로 향했다. 출석사는 오즈시에 있는 해발 820m 금산 정상에 있는 사찰로 대형 차량 진입이 불가능했다. 하여 일행은 산 아랫마을에서 9인승 택시 합승으로 갈아타고 산을 올랐다.

택시는 가쁜 숨 몰아쉬며 고불고불 구절양장의 좁은 길을 힘겹게 오르나니, 눈 앞에 펼쳐지는 경치는 가히 명승이라 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절경이었다. 뒤에 이야기를 들으니 여기는 시코쿠 지방 관광명소로 세토나이카이 국립공원 지역이라 했다. 일본인들도 우리와 같이 경치 좋은 곳을 국립공원으로 지정해 보호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우리가 타고 온 택시 기사는 74세의 노인이었다. 정말 놀라운 일이잖은가? 우리도 그 정도 나이에 택시를 모는 기사가 있기는 하다.

그러나 운행이 수월한 시내를 운전하지, 이렇게 험한 산길을 운전하는 기사는 없을 텐데 말이다. 일본인들의 또 다른 직업의식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었다. 
 
 일본의 사찰은 우리와 달리 대부분 주택가에 있다는데 출석사는 이처럼 고지대에 세워졌다. 언뜻 들은 창건 설화를 옮겨본다.

한 포수가 오랜 시간 사슴을 쫓아 여기까지 올랐는데, 갑자기 지진으로 땅이 꺼졌다는 것이다. 황당한 상황에 목숨을 구한 포수는 신의 계시라 생각하고 그 자리에 사찰을 세웠데나?
 
 정상 사찰 입구에 내려 우선 주변 경치를 살펴보았다. 삼나무 숲으로 온통 하늘을 가린 가운데 숲 사이로 보이는 경치는 그야말로 절경이다. 계곡미가 일품이다.

중간 중간 건축물이 보이는데, 목재를 베어내 가공하는 제재소라고 한다. 일본인들의 산림 자원화 정책에 경의를 표한다. 우리도 이러한 부분은 한 수 배워야 할 것 같다. 
 
 출석사에 오르니 담장 곳곳에 시주자 명단이 새겨져 있다. 객관적 입장에서 바라봤지만 그닥 아름답게 보이지는 않았다. 통상 사찰에 하는 시주는 남이 알아달라고 하는 게 아니다.

자신이 편안해지기 위해 하는 성의 표시일게다. 그런데 굳이 다른 사람 눈에 띄게 덕지덕지 가득 새겨놓아야 한단 말인가?
 
 출석사는 한 마디로 수수한 사찰이란 인상을 받았다. 우리의 사찰같이 큼지막한 목재를 사용해 지은 건축물이 아닌 소박하고 소탈해 보이는 사찰이라고 생각되었다.

우리 사찰은 단청이 있어 화려해 보이는데 여기는 그런게 없었다. 불상도 거대하지 않고 보일 듯 말 듯 조용히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주지 스님의 독경과 강항 선생 관련 이야기를 들었다. 주지는 우리 일행을 위해 법회를 열어주었다. 주지는 강항선생의 혼을 불러 특별히 모시는 의식을 진행했다. 사찰에서 보관 중이던 신주를 가져와 우리 앞에 모심을 보고, 출석사 코야마 주지스님의 강항 선생에 대한 배려가 대단함을 알 수 있었다. 
 
 우리는 스님이 독경할 때 목탁을 치는 데, 여기는 단지 모양을 한 기구를 두드리는 거였다. 쇳소리가 났다. 같은 불교 의식인데도 한・일 양국은 형식에서 부터 다름을 알 수 있었다.
 
 강항 선생께서 출석사를 찾았을 때 주지는 호인(好人) 스님이었다. 그는 당시 일본 지식인의 수준에서 볼 때 학문이 깊었고, 강항의 처지를 이해하고 배려하는 마음이 강했다고 전한다.

강항은 수시로 출석사를 찾아 주지 스님과 필담(筆談)으로 대화를 나누며, 학문에 대한 갈증을 해소시켜 주었다. 이로 인해 수은의 높은 학문이 널리 알려지는 계기가 마련되었고, 조선 선비의 자존심을 지키는 꼿꼿한 자세와 고매한 인격에 깊은 감명을 받아 존경하게 되었다.

그런 과정에서 호인은 일본의 사적이나 지리, 관제 등 여러 문헌을 보여주었고, 이 무렵에 강항은 이를 모두 베껴 본국으로 보내는 목숨을 담보한 「적중봉소」의 단초가 마련되었다. 
 
 이렇게 택시로 출석사를 찾으며, 당시 강항 선생은 이 멀고 험한 산길을 어찌 걸어 찾으셨을까 하는 의문이 생겼었다. 그러나 그 의문은 곧 풀렸다. 출석사 뒤편으로 가 대웅전 끝자락의 건물 쪽에서 바라보니, 강항 선생께서 처음 도착하신 히지가와 해변이 지척(咫尺)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아마도 강항 선생은 출석사를 오갈 때 우리가 오른 방향이 아닌 그 반대 방향의 짧은 거리를 택했던 것 같다.  출석사에서 가슴 아픈 국민적 상처 한 가지가 더 있었다. 임진왜란을 전후해 우리나라에서 약탈해간 범종(梵鐘)이 버젓이 출석사 처마끝에 걸려있기 때문이다. 주인 잃은 범종 역시 조국 잃은 강항 선생과 같은 입장이었을 것이다. ‘

역사는 힘 있는 자가 주인이다’라는 말이 생각났다. 미개민족 일본은 무력(武力)으로 문명국 조선에서 많은 것을 강탈해 갔다. 조선의 선비와 도공을 끌고 갔고, 각종 문화재를 뺏어갔다. 강항 선생은 조선의 관리로 갓을 쓴 선비라서 붙잡아갔다고 문적에 나와 있다. 미개한 그들의 눈에도 고려 범종이 예사롭지 않고 그 예술성이 뛰어나 보여 약탈해 간 것이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사이에 일본인들은 야만적으로 우리 문화재를 약탈해가는 만행을 자행했다. 문화적 열등감에서 사찰에 불을 지르고, 사찰의 중요 문화재 즉 불상, 불화, 범종 등 공예품을 마구잡이로 빼앗아 갔다. 그중의 하나가 바로 출석사 범종이다. 
 
 코야마 주지 스님은 고려 범종에 대해 말했다. 임진왜란 시 오즈의 성주 도도다카도라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휘하에서 조선 출병을 나갔다가 빼앗아 온 것이라고. 당시 출석사 주지 쾌경이 전쟁터에 나간 도도다카도라의 무사 귀환을 기도해 주었기에, 그에 대한 보은(報恩) 차원에서 사찰에 기증한 것이라고 말했다.

하여튼 조선 어느 사찰에서 온 것인지는 모르지만 이국땅 금산 출석사에 천년만년 우뚝 서 있을 것임은 분명하다. 너 어쩔 수 없다면 거기서 문명국 조선의 아름다운 예술품임을 맘껏 뽐내거라. 
 
 사찰을 내려가 점심을 먹고 바로 하지가와 해변을 찾았다. 하지가와 해변은 바다와 강이 만나는 곳이다. 강항 일행은 하관(시모노새키)을 거쳐 상관에서 작은 배를 타고 몇 날이 걸려 여기 하지가와에 상륙했다. 히지가와는 한적한 시골이다. 주변에 큰 마을이 있는 것도 아니고, 특별한 시설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농가 몇 가구만이 보일 뿐이다. 
 
 문제는 당시 강항 선생과 그 가족들의 고통이라고 본다.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이 얼마나 심했을까? 자유를 잃은 부자유가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잃은 가족에 대한 슬픔과 헤어진 어버이에 대한 그리움이 얼마나 컸을까? 미개인 일인들을 상대해야 하는 마음이 얼마나 불편했을까?

그러나 강항 선생은 언제 어디서나, 또 어떤 상황에서거나 오로지 임금과 백성만을 생각하는 의로운 신하였다. 늘 귀국의 가능성에 대한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고통을 이겨나갔다.

다행히 왜인들은 고매한 인격에 높은 학문의 소유자인 강항 선생을 바로 알아보고, 무언가 한 수 배우려고 노력했다. 이러한 학식으로 인해 그 적지에서 귀국의 염원이 비교적 쉽게 열렸던 게 아닌가 한다.   
 
 히지가와에서 오전에 다녀왔던 출석사 방향을 짐작해보았다. 한눈에 보아도 우리가 올랐던 길보다는 훨씬 빠르고 쉽게 오를 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 시간이 난다면 강항 선생께서 걸으셨을 출석사 길을 따라가 걸어보는 것도 의의가 있을 것 같다. 
 
 마지막으로 찾은 곳은 야쿠시다니(약사암) 계곡이었다. 숲이 우거져 버스가 오를 수 없다기에 우리는 2~3km가량의 일정 거리를 걸어서 야쿠시다니 계곡에 당도했다. 야쿠시다니(약사암) 계곡은 깊었다. 무언가 음습한 기운이 감싸 돌았다. 폭포도 있고, 바위도 많았다.

맑은 물이 흐르고 수량도 풍부했다. 탈출을 시도한 강항 선생 일행은 예서 잠시 숨을 고르고 우연잖게 만나 한 노승에게 전후사정을 필담을 통해 말하였다. 그 승려는 안심하라며 폭포 속에 숨어있을 것을 말하고는 유유히 사라졌다. 그런데 이게 무슨 변고인가? 왜군들이 난데없이 나타나 꼼짝없이 우아지마성 처형장으로 끌려가게 되었던 것이다.

아마도 그 승려가 강항일행을 안심을 시키고 왜군에게 밀고(密告)를 한 상황인데 그 당시 노승에 대한 울분은 보이지 않고 처형 당시 상황이 「간양록」에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망나니의 칼춤 사이로 목숨이 경각(頃刻)에 달려 있을 때 좌도의 부하가 나타나 위기일발의 상황에서 다시 목숨을 구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강항은 1598년 5월 25일 밤 조선인 포로와 함께 탈출을 시도했다. 숲길을 따라 서쪽으로 탈출해 숨어있던 곳이 야쿠시다니(약사암) 계곡이다. 강항은 계곡에서 한 노승을 만나 배편을 알아봐 주겠다는 약속을 받고 내려오다 왜병에게 붙들렸다.(간양록 중에서)
 
 일정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오며 가이드의 설명에 귀를 기울였다. 오늘 보고 느낀 감상을 정리해 보았다. 
 
 김서목 가이더의 일본에 대한 설명이 매우 분석적이라 오래 남을 것 같다. 보통의 가이드는 사실의 소개에 그치고 마는데, 우리 가이드는 그 수준을 넘어 비교, 분석, 평가까지 내리는 한 마디로 해박한 지식의 소유자로, 대단히 열정적인 여성이라 생각되었다. 
 
 차창 밖으로 전개되는 일본 농지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한 마디로 잡티 하나 없는 땅이란 생각이다. 없어야 할 건 없고, 있어야 할 것만 있는 땅이라 보인다. 논산평야를 지나다 보면 전통적인 수작(手作) 중심에서 다각 영농을 시행하는 건 좋으나, 축사, 정미소, 주택, 도로, 비닐하우스 등 온갖 시설이 난무하고 있다.

세계적인 식량 위기가 찾아오면 어디서 쌀을 생산한단 말인가? 일본의 농지는 생채기 하나 없는 땅이다. 우리 농지는 굴착기의 삽날에 상처를 입어 신음하고 있는 곳이 많다. 왜 무엇 때문에 멀쩡한 농토를 건드리는지 모르겠다. 
 
 저녁 식사는 호텔 인근 식당에서 코스요리로 했으나, 기다리는 시간이 너무 길어 맛을 떨어뜨렸다. 식당 종업원 숫자가 결코 적어서가 아니란다. 인력을 효율적으로 활용치 못하는 식당 주인의 무능이 빚어낸 결과란다. 친절한 일본인이라지만, 그게 아닌 곳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뒷맛이 씁쓸했다. 

 (이후 계속해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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