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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곤 칼럼> 조선의 청백리 – 11회

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비우당과 청백리 류관
등록날짜 [ 2023년03월04일 21시20분 ]
 # 비우당(庇雨堂)
 
서울시 종로구 낙산공원 낙산전시관에서 비우당 전시물을 보았다.
 
“비가 오면 방에서 우산을 쓰고 비를 피하며 우산이 없는 백성을 걱정하였다는 청백리 류관의 서재” 
사진 1 낙산 전시관 
사진 2 비우당 전시물 
 
내친김에 비우당을 찾았다. 종로구 창신동 청룡사 건너편에서 낙산 쪽으로 올라가는 마을버스를 타고 쌍용아파트 2단지 앞에서 내렸다. 도로 건너편 정류장 근처에는 ‘자주동샘 25m’라는 이정표가 있다. 이 표시를 따라 아래로 내려가니 초가집이 하나 나온다.

이 집이 바로 ‘겨우 비를 가릴 정도의 집’이라는 뜻의 비우당(庇雨堂)이다. 세종 때 청백리 류관(柳寬 1346 고려 충목왕 2~1433 세종 15년)이 살았다는 집인데 임진왜란때 불타 폐허가 되었다. 그리하여 그의 5대 외손인 실학자 이수광(1563∼1628)이 집을 복원하고 비우당이라 이름짓소 살았다. 이수광은 이 집에서 『지봉유설』을 지었다. 
사진 3 낙산 주변 유적지 
사진 4 이수광 (낙산전시관) 
 
사람들은 류관이 살던 초가집을 '우산각(雨傘閣)'이라 불렀다. 
 
류관은 우의정까지 지냈지만 초가집 한 칸에 베옷과 짚신으로 담백하게 살았다. 집에 울타리가 없다는 말을 듣고 태종이 선공감에게 명하여 한 밤 중에 울타리를 만들어주고 비밀에 부쳤다고 한다.

류관은 사람이 찾아오면 겨울에도 맨발에 짚신을 끌고 나와서 맞이하였고, 때로는 호미를 가지고 채소밭을 돌아다녔다. 그는 나라에서 받은 녹봉을 마을의 개울을 건너는 다리를 놓거나 길을 넓히는 일, 가난한 백성들의 식량을 사주는 일, 동네 어린이들의 먹과 붓 값으로 모두 썼다.  
 
어느 해 장마가 한 달 넘게 계속되자, 류간의 초가집에 지붕이 새어 비가 삼 줄기처럼 방으로 들어왔다. 류관은 손수 우산을 들고 비를 받으면서 부인에게 말했다. 
 
“우산도 없는 집에서는 어떻게 견딜꼬?”
 
그러자 부인이 말했다. “우산이 없는 집은 다른 준비가 있겠지요.” 
 
류관은 그 말을 듣고 웃기만 할 뿐이었다. 이 일화는 서거정의 『필원잡기』와 편찬자 미상의 『기문총화』에 나온다.  
 
류관은 1371년(공민왕 20)에 문과에 급제해 전교부령(典校副令)을 거쳐, 봉산군수·성균사예(成均司藝) 등을 역임하였다. 1392년에 조선이 건국되자 개국원종공신이 되었고, 1397년(태조 6)에는 대사성을 거쳐, 1401년(태종 1) 대사헌, 1405년 전라도도관찰사, 1409년 예문관대제학으로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를 겸했으며 『태조실록』 편찬을 주관하였다.
 
그 뒤 1421년에 다시 대제학으로 궤장(几杖)을 하사받았다. 1423년 지춘추관사로 『고려사』 개수의 명을 받고, 이듬해 우의정에 승진하여 『고려사』를 개수하여 올렸다.

1425년에 사직했으나 허락받지 못했고, 81세가 된 1426년에 사직이 허락되었다. 1433년(세종 15)에 류관이 88세에 별세하자, 세종은 어진 신하의 죽음을 몹시 애통해 하였다. 1433년 5월 7일자 『세종실록』에 생생하게 나온다.  
 
“우의정으로 치사(致仕)한 류관이 졸(卒)하였다. 임금이 부음을 듣고 곧 거애(擧哀)하고자 하니, 지신사 안숭선이 아뢰기를, ‘오늘은 잔치를 베푼 뒤이고, 또 예조에서 아직 정조장(停朝狀)을 올리지 않았으며, 날이 저물고 비가 내리니, 내일 거행하도록 하소서.’하였다. 
 
그러나 임금이 따르지 아니하고, 흰옷과 흰 일산과 부채로 홍례문 밖에 나아가 백관을 거느리고 애도식을 거행하였다. 
 
(...) 이에 이르러 졸하니, 수(壽)가 88세다. 3일 동안 조회와 저자를 정지하고, 치조(致弔)하며 조정에서 장사를 다스렸다. 시호를 문간(文簡)이라 하였는데, 학문을 부지런히 하고 묻기를 좋아하는 것을 문(文)이라 하고, 덕을 한결같이 닦고 게을리하지 않는 것이 간(簡)이다.” 
 
한편 류관은 “吾家長物 惟淸白, 世世相傳 無限人 (우리 집안에 길이 전하는 것은 오직 청백이니, 대대로 이어 끝없이 전하라.)”을 유훈(遺訓)으로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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