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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곤 칼럼> 조선의 청백리–12회 이원익 (1)

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초가집 정승 오리(梧里)대감 이원익
등록날짜 [ 2023년03월28일 10시03분 ]
 임진왜란과 정묘호란 두 번의 전란을 슬기롭게 극복하고 선조 · 광해군 · 인조 3대 임금에 걸쳐 여섯 번 영의정을 한 이가 있다. 바로 이원익(李元翼 1547∽1634)이다. 
 
오리(梧里)대감으로 불린 81세의 노정승은 1627년에 향리로 돌아왔을 때 남은 것은 비바람도 못 가리는 초가집 한 채였다. 이를 안 인조는  “정승이 된 지 40년인데 초가뿐이냐.”며 경기감사로 하여금 집을 지어 주도록 하였다.

이원익은 경기 백성들의 노고가 심하니 병든 신하를 위하여 집을 짓게 할 수는 없다고 극구 사양하였다. 그러나 인조는 “경을 위해 집을 짓는다고 말하면 경기 백성들이 반드시 달려올 것이다. 즐겁게 일하고 수고로움을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면서 집을 지어 주었다. 이 집이 경기도 광명시 충현서원의 관감당(觀感堂)이다.    
사진 1 관감당 
사진 2 광명 8경 중 4경 오리 이원익 종택과 관감당
 
이원익은 “안민(安民 백성의 편안함)이 최우선이며 나머지는 군더더기일 뿐”이라는 소신을 평생 실천한 청백리였다. 키는 석자 세치(1미터)밖에 안 되고 체구도 작아 병약하였으나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는 최선을 다했다.
   
이원익은 23세(1569년)에 문과 급제하여 동부승지 등을 거친 후, 1587년에 안주목사로 임명되었다. 평안도 안주는 국방요충지였으나 수령들의 학정(虐政)이 심하였다. 더구나 당시에는 가뭄도 극심하였다.

이원익은 부임하자마자 민생부터 안정시켰다. 우선에 평안도 관찰사에게 환곡 1만여 석을 빌려서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고 종자를 내주어 농사를 장려했다. 다행히 그해 가을에 풍년이 들어 환곡을 갚고도 창고가 가득 찼다. 
 
한편 안주는 누에치기를 힘쓰지 않았다. 이원익은 백성에게 뽕나무를 심어 누에치기를 권장하여 안주 백성들의 생활이 윤택하게 되었다. 백성들은 이 뽕나무를 이공상(李公桑)이라 불렀다. 아울러 군병방수제도(軍兵防守制度) 개편하여 병사들이 연 4회 복무하던 것을 6회로 고쳐 근무기간을 석 달에서 두 달로 군역을 줄였다.

그는 근면하고 민첩하고 청렴하고 일을 잘 처리하였으므로 아전은 두려워하고 백성은 사모하여 치적이 크게 나타났다. (선조수정실록 1587년 4월 1일)
 
1592년 4월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는 이원익을 평안도 관찰사로 임명하였다. 이원익은 성심으로 안민과 양병(養兵)하여 1593년 1월에  명나라의 이여송과 합세해 평양을 탈환하는데 기여했다. 
 
1595년에 이원익은 우의정으로 승진되고 경상, 전라, 충청, 강원 4도 도체찰사를 겸임해 성주(星州)의 체찰부를 중심으로 민심수습, 군량과 병력충원, 군 기강확립, 산성 개보수에 매진하였다. 
 
1597년 2월 6일 선조는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을 잡아 오도록 전교하였다. 왜군을 쳐부수라는 선조의 어명에 불응한 죄였다. 가장 놀란 사람은 진주에 머물고 있던 우의정 이원익이었다.

그는 급히 장계를 올려 “왜적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이순신의 수군입니다. 이순신을 가두어서는 안 됩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런데 선조는 들은 채도 안 하였다. 이원익은 거듭 이순신의 무죄를 아뢰었으나 선조가 듣지 않자 국사는 다 틀렸다며 탄식을 연발하였다. 
 
1598년 6월 명나라 감찰관 정응태가 경리 양호를 탄핵하였다. 양호가 1598년 1월의 왜장 가토 기요마사와의 울산성 전투를 승전으로 허위 보고하였다는 것이다. 
 
선조는 양호를 변호하고자 영의정 류성룡에게 명나라로 가라고 하였다. 그러나 류성룡의 입장은 분명했다. 양호의 탄핵은 명나라 내부의 문제일 뿐 조선이 개입할 사항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이러자 선조는 좌의정 이원익을 사신으로 보냈다. 이원익은 1598년 7월에 진주사로 명나라에 갔다.                                  
 
1599년 1월에 명나라에 사신으로 간 이원익이 귀국하였다. 그는 이미 영의정이 되어 있었다. 1598년 11월 19일에 영의정 류성룡이 탄핵을 받아  파직당했기 때문이었다. 귀국한 이원익은 류성룡을 비호하는 글을 선조에게 올렸다.

류성룡이 지난 10년간 정사에 소홀히 했던 것은 아니며, 사사로이 당파를 만들고 축재했다는 것은 모함이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병을 핑계하고 조정에 나가지 않았다. (선조수정실록 1599년 1월  1일) 
 
1601년에 이원익은 류성룡과 함께 청백리로 녹선되었고, 1604년에 호성공신 2등에 책봉되었으며 7월에 완평부원군(完平府院君)에 봉해졌다. 완(完)은 모자람이 없음이고, 평(平)은 치우침이 없음이다.

그만큼 이원익은 일을 완벽하게 그리고 형평을 고려한 정치를 하였다. 완평에 대한 또 다른 해석은 ‘완전히 평범하다’이다. 요즘으로 말하면 ‘보통사람’이라는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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