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항의 절의정신>
수은 강항 선생은 높은 학문에 고매한 인격의 소유자다. 벼슬길에 올라선 멸사봉공의 자세로 일하고, 피로되어선 자식을 잃는 아픔, 철저히 통제된 생활, 궁핍한 살림살이, 불확실한 미래 상황 등 여러 악조건 속에서도 적국의 정세를 살펴 세 번이나 ‘적중봉소’를 올렸다. 이는 누가 뭐래도 우국충정의 발로다.
당시 일본은 무(武)의 나라였다.권력을 가진 무사들이 칼로서 모든 걸 해결하려는 그러한 국가체제였다. 다이묘들이 할거하며 칼춤을 추던 왜인들은, 포르투갈 상인으로부터 조총을 구입한 오나노부나가에 이어 전국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중국을 칠테니 길을 잠시 비겨달라."정명가도 (征明假道)라는 허울좋은 명분으로 1592년 임진왜란을 일으켰다.
도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는 조총을 앞세워 조선을 유린했고, 걸리적거리는 노인과 유부녀 어린이를 철저하게 유린하며 금수만도 못한 만행을 7년을 통해 저질렀다. 일본 문명의 본류는 백제다. 백제 왕인박사는 당시 왜로 건너가 천자문과 한문을 전했다. 백제 아직기는 왜의 요청으로 소토큐 태자의 스승이 되고, 왜의 식자층에 한문을 가르쳤다.
여기서 일본 국보 1호 ‘목조미륵보살반가상유상’과 우리 국보 83호 ‘금동미륵반가사유상’을 비교해 보자. 한치의 빈틈도 없이 그야말로 똑 같다. 7세기 한반도에서 건너간 장인이 만든 작품이 일본 국보 1호가 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 것이다.
무(칼)의 나라 일본에서(사찰 등) 당시 중국의 일부 학문을 접할 수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러나 일본이 중국의 주자학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고 연구하기 시작한 것은 수은 강항의 가르침에 의한 것이라고 본다. 수은 강항은 승려 순수좌(후에 강항에 의해 후지하라 세이카로 칭함)로 하여금 일본 최초의 조선의 신유학자로 변신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왜승 순수좌가 자임하였다.
무(武)의 나라 일본을 문(文)의 나라로 만드는 조선의 신유학 전수에 힘을 쏟은 사람이 수은 강항이다. 처자식을 바다에 고혼으로 보내고 이를 갈듯 처절하게 복수를 다짐한 적국에서 강항의 지성상 그리고 그의 배려심(오모이 야리)이 움직여 선비로서 절의정신의 실천이라고 본다.
스스로 자청한 제자 후지하라 세이카(순수좌)를 통해 일본에 신유학의 뿌리를 내리게 한 수은 강항은 어떤 마음과 자세로 가르침에 임하였을까?
아마도 신유학의 중심 가치인 ‘인(仁)’의 사상과 선비로서 절의정신의 실천에 있었을 것이다. 도덕적 성품과 윤리적 행동을 주지시킴으로써, 다른 나라를 침략해 저지른 만행에 대한 자기성찰을 철저히 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지성상과 배려심이 수은 강항의 정신이 아닌가 싶다.
향원익청(香遠益淸)
水陸草木之花(수륙초목지화)에 可愛子(가애자)가 甚蕃(심번)하나 / (물과 육지에서 피는 초목의 꽃 가운데에는 사랑스러운 것들이 매우 많으나)
晉陶淵明(진도연명)은 獨愛菊(독애국)하고 自李唐來(자이당래)로 / (진나라 도연명은 유독 국화를 사랑하였고 당나라 이래로는) 世人(세인)이 甚愛牧丹(심애목단)이라. / (세상 사람들이 모란을 매우 사랑하였다.)
予獨愛蓮之出於泥不染(여독애연지출어니불염)하고 濯淸連而(탁청연이) 不夭(불요) / (나는 유독 연꽃이 진흙에서 나왔으나 더렵혀지지 않고 맑은 물에 씻겼으나 요염 하지 않으며)
中通外直(중통외직)하고 不蔓不枝(불만부지)하며 香遠益淸(향원익청)하고 (속은 비어있고 밖은 곧으며, 덩굴지지 않고 가지 치지도 않으며, 향기는 멀어질수록 더욱 맑고), 亭亭淨植(정정정식)하여 可遠觀而(가원관이) 不可褻翫焉(불가설완언)하노라. (우뚝한 모습으로 깨끗하게 서 있어, 멀리서 바라볼 수 있지만, 함부로 하거나 가 지고 놀 수 없음을 사랑한다)
윗글은 주돈이의 ‘애련설’ 일부다. 주돈이는 세상의 그 어떤 꽃보다도 연꽃을 사랑한다고 했다. 진흙 속에서 피어나면서도 오염되지 않고 고고한 자태를 뽐내기에 좋아한다고 했다. 또 향기는 멀어질수록 더욱 맑아진다고 했다. 이를 한마디로 ‘향원익청’이라 한다. 군자를 상징하는 연꽃의 향원익청!
바로 수은 강항의 정신과 일맥상통하는 게 아닌가? 언제 어디서나 군자의 도리를 잊지 않고, 나라를 사랑하고 타인을 배려하는 강항의 선비정신이 <향원익청>이 되어 일의 대수관계인 일본에서, 수백 년 세월 밝게 빛나고 있으니 말이다.
‘수은 강항 선생 일본 연구회’ 회원들은 선생의 절의정신을 길이 빛나도록 하기 위해 많은 연구와 노력을 하고 있다. 매년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민간교류를 위해 협력을 다하고, 매년 학술세미나에 참석하는 등 기조연설자로 나서서 발표하고 있다.
해마다 일본 금산 출석사에서는 수은 강항 추모제를 거행하는데 올해가 6회차이다. 일본 에히메현 오즈성에 억류돼 있던 수은 강항은 30리 먼 길 걸어 금산 출석사 주지 호인 스님과 교유를 했다. 당시 상황에선 수은 강항과 그나마 대화의 상대가 되는 게 호인이었다.(적중봉소의 기록의 완성)
그런 인연으로 출석사에는 수은의 위패가 모셔져 있고 매년 추모제를 모신다. 또, 시코쿠를 지나 에이메현 오즈시 시민회관 광장 앞에 일본연구회에서 건립한 ‘홍유 강항 현창비’가 우뚝 서 있다. 일본에 유교를 전파한 강항의 업적을 기리기 위한 일본인 특유의 지성심과 배려심의 표상이라 본다.
수은 강항 절의정신인 <향원익청>! 오늘도 수은 강항의 정신은 일본의 의식 있는 사람들에 의해 <향원익청>으로 빛나고 있다.
일본 문화탐방의 의미
2024년 올해로 세 번째 강항 로드 탐방에 참여했다. 그간 여정은 부산 김해공항에서 출발 후쿠오카 공항에 내려 쿠슈를 여행하고, 배로 시코쿠에 들어가 오즈성 등 수은 관련 현장을 탐방하며 수은 정신을 되새기는 과정이었다.
올해는 예년과 달랐다. 수은이 오즈에서 옮겨와 생활한 교토 주변을 살피는 일정이 잡혔다. 교토는 수은이 후지하라 세이카를 만난 곳이다. 일본에 주자학을 전해 유학의 가치를 일깨워 준 역사의 현장이다.
사람들은 말한다. 여행은 볼거리와 먹을거리가 풍부해야 한다고. 사실은 맞는 말이다. 작년 강항 로드 탐방에 우리 종중에서 모두 6명이 참가했다. 귀국해 대화를 할 때 아주머니께서 아쉬움을 표했다. 즉 볼거리가 너무 없었다는 거였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했었다.
“아주머니, 강항 로드(ROAD) 탐방은 다른 여행과 달라요. 강항 선생이 겪은 고난의 현장 을 찾아 역사적 사실을 이해하고, 정신을 느끼는 데 있어요.” “조카님도. 아무리 그래도 어느정도 볼거리가 있어야 여행하는 맛이 나지요.”
“우리는 역사 문화 탐방단이에요. 강항선생께서 낯선 이국땅에 끌려와 온갖 어려움을 다 겪으면 서도 굴하지 않고 적의 정세를 살펴 상소를 세 번이나 올리신 우국충정, 그걸 느끼고 이해하는 게 여행 목적 아닌가요?”
이번 강항로드(ROAD)의 의미를 나름대로 정리하기로 했다.
첫째, 진정한 의미의 애국이 무엇인가 느끼고 오겠다. 탈출을 시도해야만 했던 절박함, 낙서로 왜를 꾸짖은 통렬함, 먼 길 걸어 제자를 가르친 정성 등을 이해하는 노력을 하겠다.
둘째, 윤봉길, 정지용, 윤동주 관련 현장을 찾아 애국의 의미를 되새기겠다.
셋째, 코 무덤을 찾아 참배하고 임난 시 왜의 잔악상을 이해한다. 넷째, 일본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는 기회를 갖겠다.
강항의 길(ROAD)은 피로의 길이며, 고난과 치욕의 길이다. 본인 의사와는 전혀 다르게 왜군에 붙잡혀 끌려다닌 치욕의 길이다. 먼 길 끌려다녔으니 그 고통이야 어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겠는가? 당연히 고난과 고통의 길이다. 조선의 학식 있는 선비가, 한낱 이름 없는 왜의 수군에게 붙잡혀 이리저리 다녔다는 사실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치욕이다. 따라서 강항의 길(ROAD)은 치욕의 길이다.
그러나 세월은 흐르고 세상은 변했다. 언제까지나 과거에 얽매어있어서는 안 된다. 아픈 역사도 슬픈 역사도 역사는 역사다. 따라서 남길 건 남기고 털어야 할 건 털어버려야 한다. 역사는 앞으로 나가는 게 순리다. 한·일 간 부적절한 역사는 있는 그대로 역사 속에 남기고, 훌훌 털어버려야 한다.
역사의 진전을 위해 어떤 노력을 해야하는지 깊이 생각해 보는 기회를 갖겠다. 일본 땅에 신유학의 씨를 뿌린 수은 선생의 정성이, 21세기 한일 양국의 공생공영을 위한 밑거름이 되길 소망하면서….
일본 강항로드(ROAD)문화 탐방단
2024년 9월 24일 이른 아침, 인천 국제공항 제2터미널에 함께 할 사람들이 모여 인사를 나누었다. 멀리 광주에서 대전에서 그리고 서울에서 새벽 공기 가르며 달려왔다.
2024년 강항 로드(ROAD) 탐방단은 예년에 비해 퍽 단출해졌다. 가이드는 일본 강항로드(ROAD) 전문인 조이투어 최금환 대표이다. 최 대표는 강항 연구가로 널리 알려진 분이다. 작년 여행에서 인연을 맺어 구면인 관계로 반가웠다. 그의 깊이 있는 설명이 기대되었다. 작년 일본 여행에서 돌아왔을 때 그는 동토 윤순거를 이해할 수 있는 자료를 요구했다. 나는 기쁜 마음으로 자료를 보냈다. 동토 행장과 신도비명 그리고 여러 편의 시문을 보낸 바 있다.
우리는 공항 식당으로 가 아침 식사를 했다. 맛집으로 이름난 식당은 순두부 찌개가 대표 음식이라 했다. 보글보글 끓는 순두부에 밥 말아 먹으며, 일본 여행의 얼개를 그려보았다. 작년과 다른 코스여서 기대되었다. 겉핥기가 아닌, 속살을 파헤치는 여행을 하고자 다짐했다.
내산서원 보존회 강재원 회장은 특별한 분이다. 고령임에도 내산서원 보존 및 선조의 위업 현창 사업에 전심전력하고 있다. 강항 로드(ROAD) 답사에도 매해 빠짐없이 참여한다. 강 회장의 이런 자세는 선대부터 내려온 가풍인 것 같다.
역사 연구가 강남주 선생은 법원 고급공무원 출신이다. 인천지방법원 사무국장을 끝으로 공직 생활 마감 후, 한자 교육과 중국사 연구를 계속하며 ‘사마천의 사기 속의 진시황’과 ‘항우와 유방, 진시황을 만나더니!’ 두 편의 저서를 낸 바 있다. 그는 강항 로드(ROAD) 답사를 통해 수은의 진면목을 찾아 새로운 글의 소재로 삼으려 하는 것으로 보였다.
K-선비 한복 축제 대상 수상자 신광섭 역시 남다른 분이다. 우선 한복 축제 하면 여성을 먼저 떠올리게 되는 데, 심 선생은 남자라서다. 거기에 육군사관학교 출신의 예비역 대령 신분에 한복 모델이라는 게 선뜻 이해가 되질 않아서다.
종제 충식은 여러 형제 중 숭조 정신이 가장 뛰어나다. 위로 언니(우리 집안에선 형을 언니로 호칭함)가 있음에도 봉제사와 선영 관리에 앞장선다. 십수 년 전 내 대종중 총무유사 시 그를 불러 종학 유사를 맡겼는데, 성실한 태도로 역할을 수행원로들의 신임이 컸다.
여기서 다시 최금환 대표!!
그에 대해 소개하고자 한다. 그는 단순한 사업가가 아니다. 한국과 일본의 문화 전도사다. 일본의 역사를 훤히 꿰뚫고 있다. 한국의 역사, 문화, 전통 등 모든 분야에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다. 특히 호남지역의 역사 인물인 수은 선생에 대한 연구를 많이 하여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최 대표는 한국 관광객에게 일본의 속살을 보여주려 노력한다. 일본의 과거와 현재, 일본인의 잠재의식까지도 파헤쳐 보이려 노력한다. 일본인에게 강항 정신을 이해시키는 노력도 한다. 강항의 배려로 무의 나라 일본이 문의 나라로 접어들게 되었음을 이해시키려고도 노력했다.
강항의 선비정신이 21세기 한·일 파트너쉽의 중심 가치로 자리매김하도록 하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최금환 대표!! 그는 진정한 민간외교관이다.
인천국제공항과 간사이국제공항
2024년 9월 24일 아침 인천 국제공항 제2터미널에서 진에어에 몸을 실은 일행은, 동해를 날아 간사이 국제공항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비행기에서 내려 입국장을 향하는데, 안내 표식이 한글로 병기돼 있어 깜짝 놀랐다. 일본어, 영어, 한자, 한글 이렇게 4개국 문자로 안내를 하고 있었다.
그간 일본을 여러 차례 여행했는데도 이번처럼 뚜렷한 한글 표기는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힘없고 부족했던 나라 대한민국이 당당한 일류 국가로 자리매김했음을 알 수 있는 증거로 보여 가슴 뿌듯했다.
우리가 내린 간사이 공항은 아시아 허브 공항을 꿈꾸며 건설의 삽을 떴다고 한다. 오사카 국제공항의 과밀화와 소음 문제 해결 위해 바다에 건설한 해상공항으로, 1994년 9월 공식 개항했으며 24시간 이착륙이 가능하단다.
우리 인천공항은 간사이공항을 롤모델로 동북아 허브공항을 지향하며, 영종도 일대 섬을 이용해 건설한 해상공항이다. 간사이 공항보다 6년여 늦게 2001년에 개항했다.
인천공항과 간사이공항 둘 모두 해상공원으로 연육교로 연결되었으며, 동북아 허브 공항을 꿈꾸며 개항했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두 공항의 운명이 확연히 달라졌다.
후발 주자인 인천 국제공항은 동북아 허브공항 위치를 확고히 다진 반면, 간사이 국제공항은 뒤쳐졌기 때문이다. 간사이공항은 여객 및 물동량 처리 규모에서 인천공항 절반에도 못미치고 있는 실정이다.
다음호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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