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성(임원) 3명의 차안 대화
히로시마 총영사관 방문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여성 임원 3명의 대화를 들었다. 내 뒤에 앉은 그들은 숙소로 향하는 서너 시간 동안 쉼 없이 대화를 이어갔다. 대화의 소재도 다양했다. 동서고금, 역사와 전통, 가족의 역할, 자녀 교육, 취미와 여가 등 사람이 살아왔고 살아가며 부딪치는 모든 장면이 대화의 소재였다.
두 명의 일본 국적자와 한 명의 한국 국적자가 얽히고 설킨 관계지만 한국과 일본을 다 같이 이해하는 공통 분모를 가지고 있다.
거침없고 막힘없는 대화가 흡사 우리네 동서 간 대화 같다. 아니 여고 동창 간 대화 같았다. 문화가 같고 사상이 같다. 그들의 대화엔 갈등이 전혀 없다. 막힘이 없이 자연스레 흐른 여성임원들의 막힘없는 대화에서 한국과 일본의 내일을 본다.
영원한 동반자로 천년만년 새역사를 창조해 과거의 갈등 넓은 마음과 긴 안목에서 말끔하게 씻어내고 세계 속의 동양의 중심 국가로 그 역할 앞장서 이끌어가는 원동력이 되었으면 좋겠다.
오사카 성 탐방
또 다른 만남을 약속하며
2024. 09. 24 – 09. 28의 4박 5일간의 모든 탐방 일정이 끝나고 이별의 순간이 돌아왔다. 전날 함께 하지 못한 최금환(조이 여행사 대표)을 호텔 로비에서 만났다.
“어제 우리가 뭘 한지 알아요?” “뭐 그저 그렇지, 별 수 있었겠어요?” “아뇨. 맛있는 회도 먹고, 온천욕도 했는 걸요.” “아니, 지금 저 약 올리시는 거예요?” “아무렴, 그렇죠.” “에이, 속상해. 내년에 다시 와야겠다.” 우린 그렇게 농담을 주고받으며 마츠야마 공항으로 향해 귀국 비행기에 올랐다.
인천공항 제1터미널에 내린 우리를 강재원 회장은 오찬을 같이 하자며 모두를 식당으로 이끌었다. 강남주 선생은 최근 집필한 ‘항우와 유방, 진시황을 만나더니!’를 선뜻 건네준다. 이왕이면 서명까지 부탁했다.
‘지행합일(知行合一)을 실천합시다’라는 글을 써 주셨다. 바로 그것이다. 앎을 실천하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말을 말로써 끝내지 않고 실행에 옮기는 일 그게 바로 지행합일이며, 강재원 회장이 모범적으로 행하는 활동이며, 수은 강항 선생께서 남기신 ‘강항의 향기’인 것이다.
일행 한 분 한 분과 굳게 손잡고 다음을 약속했다. 사실 2022년 답사 때 방을 함께 쓴 분은 강남주 선생이었다.
여행 마치고 헤어지며 다시 만날 것을 약속했으나, 그건 의례적인 인사에 불과했다. 사는 곳과 하는 일이 전혀 달라 다시 만날 명분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과 2년 만에 다시 만났잖은가. 인연이란 참으로 소중함을 실감했다. .수은 강항의 정신.을 계승한다는 공통 분모 있어 재회의 기쁨을 맛본 것이다.
수은과 동토 후손의 활동조명
1635년(인조 13)에 용계사(龍溪祠)라는 이름으로 사액(賜額)받고, 1702년(숙종 28)에 중수하였다. 그러나 1871년 5월 9일(고종 8년) 흥선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용계사는 비운을 맞았다. 땅을 치며 통곡한들 무슨 소용이 있었으리오. 지하에 계신 수은 선생을 무슨 면목으로 뵐 수 있으리오.
그런 아픔을 슬기롭게 이겨 내 1974년 전라남도 영광군 불갑면 쌍운리 22-4 현재의 위치로 옮겨 다시 <내산서원>으로 건립되었다. 1977년 10월 20일에는 전라남도 기념물로도 지정되었다. 최근 들어 임진왜란 400주년 재조명사업의 일환으로 1992년부터 연차적으로 유적지 사업으로 정비하였다.
뜻있는 후손과 호남유림은 매년 개최하는 강항문화제를 적극 응원해 왔다. 2024년 7월 17일 무라까미 쓰네오 일본초대회장이 수장하고 있던 <종오소호>편액 기증식을 이낙연 제45대 국무총리가 주도해 내산서원 유물전시관 광장에서 거행했다.
이어 2024년 9월 20일 제5회 강항문화제를 개최하면서 진주강씨 사평공종회에서 거금을 내 9월 23일 간양록 노래비를 세우고 강항 선생 묘정비를 건립했다. 또, 내산서원 한쪽 구석에 방치한 신도비를 홍살문 쪽으로 이거(移去)하기도 했으며 광주향교 상량문 비석도 새롭게 건립했다.
이렇듯 오늘도 수은 정신을 기리려는 정의로운 유림이 나서고 내산서원을 찾아 참배하며 ‘강항의 향기’에 취하곤 한다.
동토 윤순거를 닮아가는 문천(汶川) 윤두병
“내산서원 복원 시 동토 후손 한 사람이 3개월간 여기 머물며 돕고 갔다는데...” 라고 수은 강항문중에서는 구전으로 내려오는 인물이시다. 앞서 나온 강재원회장의 질문에 답도 되겠다.
문천(汶川) 윤두병(尹斗炳, 1870∼1944)은 동토 윤순거의 10세손이다. 대대로 벼슬하는 가문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부친 윤상익(尹相翊)도 문과에 급제 이조참의를 지냈다. 아동문학가 윤석중(尹石重, 1911∼2003) 선생의 백부(伯父)이기도 하다.
윤두병은 1888년 19세 시 문과 병과에 장원 급제한 후 한림, 세자시강원 필선, 승지를 거치며 벼슬을 했다. 이후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박탈당하자 죽음을 각오하고 극한 투쟁을 전개했다. 시종무관장 민영환 등 50여 동지들과 수차례 을사늑약 반대 상소를 올렸으나 효과가 없었다.
윤두병은 1905년 12월 3일 보신각 앞 시민이 운집한 장소에서, “신하의 도리를 다 하지 못해 이천만 동포에게 사죄하노라.”하며 음독 자결을 시도했으나 미수에 그쳤다. 그 결과 후유증이 심해 벙어리 수준의 깊은 상처를 입게 되었고, 평생 반벙어리 신세로 생활해야만 했다.
1908년 고종께서 목민(牧民)이 시급하단 간곡한 왕명으로 연산현 임지에서 지내던 중 경술국치를 당해 팔도와 만주 등지를 떠돌며 독립 의지를 불태웠다. 이후 유람 중 용계사 복원 소식을 듣고, 3개월간 현장에 기거하며 복원 내용을 지켜보고 일손을 돕는 사은(師恩) 활동을 하였던 것이다.
을사늑약에 앞장선 이지용, 이근택, 박제순, 이완용, 권중현을 일컬어 을사오적이라 한다. 이에 반해 민영환, 조병세, 송병찬, 홍만식, 이상설, 이한응, 이상철, 전봉학, 윤두병, 송병선, 이건석은 죽음으로 항거했다. 거기 동토 후손 윤두병도 당당히 구국의 대열에 합류했다.
윤두병은 9대 조부이신 동토 윤순거의 사은 활동을 이어받아 그 정신을 실천한 것이다. 동토의 아름다운 스승의 은혜에 보답하는 정신 또한 향원익청이리라. 이를 후손이 이어받아 실천함은 결국 수은 선생의 가르침에서 기인한 것으로, 그 향기가 멀리 멀리 맑게 퍼지는 향원익청이리라.
강항의 향기, 난방(蘭芳)!
향기(香氣)는 꽃이나 향수 등에서 나는 좋은 냄새를 말한다. 인간에게 좋은 기분을 자아내게 하거나 정서적 안정을 주는 향기를 말한다. 즉 향기 중 으뜸이 선비의 향기이다. '화향백리 인향만리(花香百里 人香萬里)'라고도 했다.
강항 선생은 일본에 2년 8개월간 피로되었을 때도 난방(蘭芳)이라는 글을 <종오소호> 사자성어와 함께 가장 즐겨 써줬다고 추정한다. 이 난방이라는 단어의 뜻이 인간이 향기인 즉 선비의 향기를 말한다. 그러한 난방이 선비로서. 우국충정, 배려, 절의, 희생 등 ‘실천하는 양심’이다.
수은은 왜국의 군 편제와 생활상 등 많은 정보를 파악해 상소를 올렸다. 발각되면 목숨이 위태로운데도 감수하고 행동한 충성의 길이었다. 비록 적국 백성일지언정 사무라이에게 한없이 작아져 굴종당하는 그들에게 배워 그들의 만행을 알아야 한다며<강항휘초>를 전수해 가르침을 주었다.
왜적에 대해서는 증오심으로 가득했지만 왜인은 미워하지 않는다는 지성(至性)성이며 배려(오모이 야리)심의 발로다. 왜적에게 얼마나 위험한 행동이었으면 후지하라까지 나서서 염려의 말을 했을까.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고 행동했던 절의 정신의 표상이다.
강항의 향기는 백성에게 필요한 정신이다. 임금에게 요구되는 정신이다. 국가를 책임진 임금과 관리가 강항의 향기를 맡았다면 왜적과의 참화는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21세기에 요구되는 강항의 향기, 대한민국 국민을 이롭게 하는 아름다운 향기, 그 이름 난방(蘭芳)이어라!
탐방 수기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