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바일모드 | 로그인 | 회원가입
2020년09월21일mon
 
티커뉴스
OFF
뉴스홈 > 사설ㆍ칼럼 > 김세곤칼럼
kakao 트위터로 보내기 싸이월드 공감 네이버 밴드 공유
쪽지신고하기 기사글확대 기사글축소 기사스크랩 이메일문의 프린트하기

<김세곤칼럼>북인도 여행(3)

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 델리 라지가트 (1)
등록날짜 [ 2020년08월30일 09시20분 ]


[ 더 큰 세상(正論直筆)위해 구독 YOU ME 클릭 ]


2019년 5월 11일 오전 9시 반, 인도 델리의 라지가트(Raj Ghat)를 답사했다. 라지가트는 간디가 암살당한 다음 날인 1948년 1월 31일에 화장이 치러진 곳이다. 입구에서 5분 정도 걸어가니 정문이 있다.
 
사진 1  라지가트 입구 
 

날씨가 더워서 그런지 관리 직원이 정문 주변을 물 뿌리고 있다. 정문 벽에는 힌두어와 영어로 ‘라지가트’와 ‘마하트마 간디(1869∽1948)’ 안내 동판이 각각 있다.

사진 2  라지가트 정문 

우선 간디 영문 안내판을 읽었다. 안내판에는 간디의 상징인 안경과 물레가 위와 아래에 그려져 있다.

“마하트마(‘위대한 영혼’) 간디로 잘 알려진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는 1869년 10월2일에 포르반다르에서 태어나 1948년 1월30일 델리에서 암살당했다. 그는 인도에서 고교를 졸업하고 1887년에 영국으로 유학하여 변호사가 되었다.

그는 1893년에 남아프리카로 가서 ‘사탸그라하(진실 파악을 위한 비폭력 · 불복종 운동)’를 통해 20년 넘게 인도인의 권익 보호에 앞장섰다. 1915년에 인도에 돌아온 그는 1947년까지 ‘사탸그라하’를 발전시켜 인도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그는 자유를 위한 투쟁을 하면서 국민을 단결시켰고, 국부(國父)라 불린다. (후략)” 

  
사진 3  간디 안내 동판 

사진 4  라지가트 안내 동판 

1948년 1월 30일 오후 5시에 간디는 기도회에 가는 도중에 힌두교 광신도 나투람 고드세가 쏜 총에 맞았다. 간디는 ‘헤람(Hai Ram,  오 라마 신이여!)’이라고 나직이 말하면서 쓰러졌다.  

1947년 8월에 인도는 영국으로부터 독립했다. 그런데 인도는 힌두교의 인도와 이슬람교의 파키스탄으로 분리 독립되었다. 한국은 사상 때문에 남한과 북한으로 갈라졌는데, 인도는 종교 때문에 인도와 파키스탄으로 나뉜 것이다.    

1944년에 인도의 독립이 가까워지자, 인도 내에서 소수파였던 이슬람교도들은 ‘힌두교의 인도’에 편입될 경우 종교의 자유가 제약받을 것을 우려했다. 이슬람 교도들은 진나를 중심으로 분리 독립운동을 벌였다. 

1944년 7월에 간디와 진나는 14차례나 무릎을 맞대었다. 간디로서는 힌두교도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자존심을 꺾으면서 만난 것이었다. 간디는 ‘독립이 먼저’라며 진나를 설득했지만 진나는 ‘분리가 먼저’라며 고개를 돌렸다. 결국 협상은 결렬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연합국의 승리로 끝나자 진나는 분리 독립을 결행하고 1946년 8월16일을 ‘국민 행동의 날’로 선언했다. 4일 후에 캘커타에서 힌두교도와 무슬림 사이에 유혈 충돌이 벌어졌다. 5천 명의 사망자와 1만 5천 명의 부상자가 발생하는 참극이었다. 비하르에서는 힌두교도가 1만여 이슬람교도를 학살했다. 인도는 독립하기도 전에 갈기갈기 찢어졌다.

1947년 6월에 영국은 파키스탄의 분리 독립을 결정했고, 8월15일에 정권 이양을 선포했다. 이러자 진나가 이끄는 파키스탄은 1947년 8월14일에, 네루의 인도는 8월15일에 독립 선언했다. 



하지만 분열된 인도는 간디가 원하는 인도가 아니었다. 간디는 이슬람교와 힌두교가 화합하는 인도를 염원했지만 허사였다. 인도가 독립한 8월15일에 간디는 캘커타에서 공식 메시지 없이 지냈다.  

한편 파키스탄과 인도가 분리 독립하자 이슬람교도는 파키스탄으로, 힌두교도는 인도로 가는 민족 대이동이 일어났다. 이 와중에 곳곳에서 유혈사태가 일어났다. 펀잡은 화염과 피로 얼룩졌고 라호르도 불탔다.  


10월에는 카슈미르에서 인도-파키스탄 전쟁이 일어났다. 카슈미르는 주민의 대부분이 이슬람교도라서 파키스탄에 편입되기를 바랐으나 카슈미르의 지도자 하리 싱은 힌두교도였기 때문에 주민들의 기대와는 반대로 인도로 편입할 것을 결정하였다. 이에 카슈미르의 이슬람교도들이 폭동을 일으켰고 하리 싱은 인도에 지원 요청하였다.

이러자 간디는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의 화해와 일치를 위해 단식하였다. 이는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그의 이러한 모습은 힌두교 급진주의자들에게는 이슬람교도를 편드는 것처럼 보였다. 결국   간디는 1948년 1월 30일에 델리의 저녁 기도회에 가다가 암살당했다. 그의 나이 79세였다. (계속)

올려 0 내려 0
김세곤 이 기자의 다른뉴스보기
무통장입금 정보입력 입금자명 입금예정일자
(입금하실 입금자명 + 입금예정일자를 입력하세요)
[관련뉴스]
<김세곤칼럼>북인도 여행(4)
<김세곤칼럼> 북인도 여행 (1)
트위터로 보내기 싸이월드 공감 네이버 밴드 공유
기사글확대 기사글축소 기사스크랩 이메일문의 프린트하기
<김세곤칼럼>북인도 여행(4) (2020-09-04 11:21:25)
<김세곤칼럼>타지마할 (2020-08-26 20:25:38)
광주 ‘빛고을혁신학교 초등 권...
광주 서구, ‘호동이네 든든한 ...
강진군, '소상공인 스마트 시...
이용섭 광주시장, 추석 앞 민생...
강인규 나주시장, 광주·전남 ...
전남도, 향우와 도민 추석 연휴...
행안부, 민생규제혁신 토론회.....
현재접속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