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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곤칼럼>임오군란 (3)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 ‘부패에서 청렴으로’ 저자)- 중전 민씨에 대한 국상(國喪)을 치르다.
등록날짜 [ 2020년11월17일 06시42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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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2년 6월 10일 오전에 성난 군졸과 하층민들은 창덕궁 돈화문으로 몰려갔다. 겁에 질린 수문장은 도망갔고 군졸과 백성들은 민생을 파탄 낸 중전 민씨부터 찾았다.


먼저 이들은 선혜청 당상 민겸호를 궐 안에서 죽였다. 이어서 입궐하려는 경기감사 김보현도 때려 죽었다. 군졸들은 김보현의 시체를 발로 차면서 말했다.

 “이놈은 돈을 좋아했으니 돈으로 배를 채워주자.” 

군졸들은 김보현의 입을 찢어 엽전을 집어넣고 총대로 마구 짓누르니, 엽전이 갈비뼈 사이로 튀어나왔다고 한다. 군졸들은 그의 시신을  민겸호의 시신과 함께 궁궐 개천에 버렸다. 마침 큰 비가 와서 물이 불어 개천이 넘쳤는데, 날씨까지 흐리고 무더워서 시신이 버려져 있는 며칠 동안 살이 물속에 잠겨 하애졌다. 그것은(짐승을) 잡아 놓은 것 같기도 하고 씻어 놓은 것 같기도 했다. (황현 지음·허경진 옮김, 매천야록, p 82)

변란에 놀란 고종은 급히 대원군을 불렀다, 대원군은 부대부인 민씨와 함께 입궐했다. 난군(亂軍)들은 중전 민씨를 찾으려고 장막과 벽을 창으로 찌르면서 온통 궐 안을 수색했다. 이때 부대부인 민씨가 중전을 사인교 안에 숨기고 휘장을 가리고 나왔다. 그런데 궁인 하나가 중전이 저기 있다고 외쳤다. 난군들이 사인교의 휘장을 찢고 중전의 머리채를 끌어내 땅바닥에 팽개쳤다. 이 때 무예별감 홍계희가 크게 외쳤다.


“이 여인은 상궁으로 있는 내 누이이니 오인하지 말라.”

그는 중전 민씨를 업고 창덕궁을 간신히 빠져나와 화개동 윤태준의 집으로 모시고 갔다. 중전은 그곳에 은신하다가 여주의 민영위 집에 며칠 있다가 다시 충주 장호원 민응식의 집으로 피신했다. (고종실록 1882년 7월 25일)

중전 민씨가 피난하면서 한강을 건너려고 하자 뱃사공들이 난색을 표하면서 말했다. “서울에서 뱃길을 끊으라는 명령이 있었습니다. 도구나 행색이 의심스러우니 건네줄 수가 없습니다.”

중전이 금가락지를 빼어 가마 밖으로 던져주자 비로소 강을 건널 수 있었다. 이윽고 중전이 경기도 광주를 지나 쉬는데, 어떤 할미가 다가와 피난 가는 아낙네로 생각하며 한 마디 했다.

“중전이 음란하여 이런 난리가 일어나 낭자가 여기까지 피난오게 되었구려” 

중전은 말없이 듣기만 했는데, 나중에 환궁한 뒤 이 마을을 모두 없애 버렸다. 따라간 자들이 뱃사공의 죄도 다스리자고 했지만 그것은 허락하지 않았다 (매천야록, p 85-86)

한편 고종은 군사들의 변란에 놀라 스스로 자책하는 전교를 내렸다.  

"오늘의 일에 대해 어떻게 차마 말할 수 있겠는가? 다만 부덕한 내가 외람되이 크나큰 왕업(王業)을 이어 백성들을 제대로 돌보아주지 못한 결과 전에 없던 이런 변고를 초래하였다. 이것이 어찌 그들이 일부러 범하고 화(禍)를 즐겨 그런 것이겠는가? 첫째도 나의 잘못이고 둘째도 나의 잘못이다. 말이 이에 미치니 절로 한심해진다. 승정원(承政院)에 있는 승지들은 일일이 효유(曉諭)하여 그들로 하여금 물러가게 하라."(고종실록 1882년 6월 10일 2번째 기사)  

하지만 성난 군졸들에겐 고종의 전교가 전혀 먹혀들지 않았다. 군졸들은 중전 민씨를 찾아내기 위해 궁궐을 계속 뒤졌다.

이러자 대원군은 ‘중전이 죽었다.’고 꾸몄고, 고종은 “중궁전(中宮殿)이 오늘 오시(午時)에 승하하였다. 거애(擧哀)하는 절차는 규례대로 마련하고 망곡처(望哭處)는 명정전(明政殿) 뜰로 하라. 빈전(殯殿)은 환경전(歡慶殿)으로 하라."고 전교하였다. (고종실록 1882년 6월 10일 7번째 기사)

이윽고 국장도감이 설치되고 국상은 18일로 정해졌다. (고종실록 1882년 6월 11일) 


이러자 11일에는 시체도 없이 목욕과 염(殮)을 행했으며, 14일에는 시체 대신 옷을 관에 넣고 입관 의식을 치른 후 빈소까지 차렸다. 17일에는 무덤 이름을 정릉(定陵), 시호를 인성(仁成)이라고 정했다. 국상(國喪)이 18일에 치러졌다. 장호원에 숨어있는 중전 민씨는 공식적으론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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