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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곤칼럼>임오군란 (4)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 ‘부패에서 청렴으로’ 저자)- 대원군은 납치당하고, 민비는 귀환하다.
등록날짜 [ 2020년11월18일 23시24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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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오군란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자 고종은 흥선대원군에게 전권을 맡겼다. 8년 만에 정권을 장악한 대원군은 곧바로 군인들에게 녹봉미 지급을 약속하고, 별기군을 혁파해 5군영 체제로 군제를 되돌렸다. 이러자 군졸들은 궁중에서 물러나 질서가 회복될 수 있었다. 이어서 대원군은 통리기무아문을 폐지하고 삼군부를 부활시켰고, 위정척사운동으로 유배당한 유생들 900명을 석방하는 조치를 단행했다.

한편 중전 민씨는 은밀히 고종에게 살아있음을 알리고, 민씨 척족을 통해 청나라에 있는 영선사 김윤식에게 통지하여 청나라에 변란을 알렸다.  김윤식과 어윤중 등은 청나라에 ‘조선에 군대를 보내 국왕을 보호하고 난을 진압해달라’고 요청하였고, 청나라는 이번 기회에 종주국(宗主國)으로서 조선에 대한 우월한 기득권을 회복하고자 군대 파견을 결정했다. 

7월 7일 경기 화성의 남양만에 도착한 광동 수군제독 오장경은 4,5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서울 동묘에 사령부를 설치했다. 7월 13일에 오장경 등은 고종을 알현한 뒤 운현궁으로 대원군을 예방했고, 이 날 저녁 청나라 군영을 답방한 대원군은 체포되어 천진으로 호송되었다. 이후 대원군은 중국에서 4년간 유폐 당했다. 이로써 33일간의 대원군 집권은 종막을 고하게 되었다. 

다음날 남대문에 청군이 내건 방문이 붙었다.

“태공이 왕비를 시해사건에 간여했다는 소문이  중국에까지 알려져 황제께서 그 진위를 알아보려 한다. 그래서 어제 흥선대원군을 데리고 갔으니 일이 밝혀지면 곧 돌려보낼 것이다. 인민들은 두려워하지 말라.”(황현의  『매천야록』)

이에 서울은 다시 요동쳤고 민씨 척족들은 춤을 추었다. 7월 16일 밤  부터 청군은 폭동군인들 소탕에 나섰다. 왕십리와 이태원 일대로 출동하여 170여 명을 체포하고 20명을 처형하였다.

한편 청나라보다 앞서 병력 1,000여 명을 이끌고 서울에 도착한 일본 하나부사 공사는 조선 정부를 상대로 7개 조항의 요구 조건을 제시하며 이를 받아들일 것을 강요하였다. 처음에는 난색을 표하던 조선 정부는 대원군이 체포된 직후부터 본격 교섭에 나서 7월 17일에 일본 정부의 요구 사항이 대폭 반영된 6개 조항의 제물포조약을 체결하였다.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 ‘부패에서 청렴으로’ 저자)
조선 정부는 피해보상금으로 유족에게 5만엔, 일본 정부에 50만엔 도합 55만엔을 보상하기로 했다. 이 액수는 조선 정부 1년 예산의 1/3에 해당되는 어마어마한 액수였다. 또한 일본 공사관 경비를 위해 일본군 1개 대대가 배치되었다. 1개 대대의 병력을 주둔시킨 것은 2년 후인 1884년에 갑신정변이 일어나는 요소가 되었다.

한편 중전 민씨는 8월1일에 청나라 군인들의 호위를 받으며 위풍당당하게 한양에 입성했다. 민씨 척족이 재집권하자, 청나라는 조선의 내정과 외교에 깊숙이 간섭했다. 8월 23일에 청나라의 직례총독 이홍장·주복·마건충 등과 조선의 조영하·김홍집·어윤중 등이 전문 8조의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朝淸商民水陸貿易章程)을 체결하였다.

이 조약은 희대의 불평등조약이었다. 장정(章程)은 첫머리에 “이 수륙무역장정은 중국이 속방(屬邦 속국)을 우대하는 뜻에서 상정한 것이고, 대등한 국가 간의 일체 균점(均霑)하는 예와는 다르다.”고 전제하고, 1항에서 청의 북양대신과 조선의 국왕은 대등한 지위를 가진다고 규정하여 조-청이 지배-종속 관계임을 명문화했고, 청나라 상인의 특권을 인정받아 조선 상인들은 더욱 불리해졌다. 심지어 재정 고문 진수당은 ‘조선은 청국의 속국’이라는 구절을 넣은 방문(榜文)을 공공연히 남대문에 붙이기까지 하였다.



이윽고 오장경과 원세개 등이 이끄는 청군 3천 명이 서울에 상주했고, 이홍장이 추천하는 마건상이 정치고문으로, 독일인 묄렌도르프는 외교고문을 하였다. 

이처럼 임오군란을 거치며 조선을 차지하려는 일본과 청나라의 움직임은 더욱 가속화됐지만, 고종과 중전 민씨는 정권 유지를 위해 외세 의존적인 모습을 보임으로써 자주국가로서의 면모는 더욱 퇴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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