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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곤칼럼>고부 농민봉기와 조병갑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 조선은 총체적 부패국가
등록날짜 [ 2020년11월23일 16시01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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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1월10일 동학농민혁명의 도화선이 된 고부농민봉기가 일어났다. 고부농민봉기는 고부군수 조병갑(1844∽1911)의 탐학 때문이었다.

함양군수(1886년 4월-1887년 6월)등 여러군데 군수를 한 조병갑은 거금 7만 냥을 바쳐 1892년 4월 28일에 고부군수로 부임했다. 그는 부임하자마자 수탈에 나섰다. 임기가 3년이라지만 언제 발령날지 모르는 것이 수령 임기였다.

조병갑은 고부 백성들을 수탈하고 괴롭혔다. 1) 농민들을 동원해 만석보를 쌓고는 처음 약속을 깨고 수세를 700석 거두었고 2) 황무지 개간 시 세금 5년 면제를 약속하고서 농민이 황무지를 개간하자 세금을 물렸다.


3) 논 3천 평당 세금을 쌀 100말이나 거두어 실제 국세보다 3배나 더 거두었고,4) 백성들에게 불효 · 음행 · 잡기 등 갖가지 죄목을 엮어 옥에 가둔 후 돈을 받고서야 풀어주었는데, 그렇게 거둔 돈이 2만여 냥이었다. 5) 태인현감을 지낸 부친 조규순 공적비를 세우면서 1천 냥을 뜯어냈고, 6) 대동미를 농민에게는 좋은 쌀을 징수하고 정부에 상납할 때는 나쁜 쌀을 사서 바쳐 그 차액을 착복했다.

특히 1893년은 흉년이 들고 전염병마저 돌아 농민들의 생활이 비참했음에도 조병갑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마구 수탈했다.  
 

이런 수탈을 견디지 못한 고부 농민들은  전창혁(전봉준의 아버지) · 김도삼 · 정익서가 주동이 되어 1893년 11월에 1차로 40명, 2차로 60명이 고부관아로 몰려가 수세(水稅)를 감해 줄 것을 진정하였다. 그런데 그들에게 돌아온 것은 몽둥이뿐이었다. 주동자들은 감옥에 갇히고 모진 고문을 당하였다.  
 

이러자 전봉준과 송두호 등 20명은 사발통문을 돌리고 무력봉기를 모의하였다. 통문에는 ‘고부성을 격파하고 군수 조병갑의 머리를 벨 것, 무기창고와 화약창고를 점령할 것, 군수에게 아부하고 백성을 수탈한 아전을 쳐서 징계할 것, 전주감영을 함락하고 서울로 곧바로 나아갈 것’등이 적혀 있다.

그런데 11월 30일에 조병갑이 익산군수로 발령이 나자 봉기는 무산되었다. 하지만 영의정 조두순의 조카였고, 이조판서 심상훈과 사돈인 조병갑은 전라감사 김문현에게 줄을 대어 1894년 1월 9일에 다시 고부군수로 유임되었다. 그가 익산군수 발령 후 39일 동안에 6명이 고부군수로 임명되었지만 모두 부임하지 않은 것이다.  

이조(吏曹)에서 전라 감사 김문현이, ‘전 고부군수 조병갑이 오랫동안 조세에 손실이 난 것이 많아 지금 차례로 장부를 정리하고, 또 조세를 받는 일이 바야흐로 벌어져서 일에 갈피를 잡을 수 없다고 하면서 유임시킬 것을 장계(狀啓)로 하였습니다.’라고 보고한 그대로 아뢰니 고종은  아뢴 대로 하라고 하였다. (고종실록 1894년 1월 9일)  

 마침내 1월 10일 밤에 전봉준이 이끄는 농민들은 말목장터에서 봉기하여 11일 새벽에 고부관아(지금의 고부초등학교)로 쳐들어갔다. 낌새를 알아차린 조병갑은 이미  전주로 도망치고 없었다.

그러면 이후 조병갑은 어찌 되었을까? 조병갑은 1894년 5월4일에 의금부에서 심문을 받았다.(고종실록 1894년 5월 4일 )  의금부(義禁府)에서 아뢰었다.


"죄인 조병갑(趙秉甲)에 대하여 신문 조목을 다시 만들어 엄하게 형장(刑杖)을 쳤으나 한결같이 말을 꾸며대면서 끝내 사실대로 고하지 않고 있습니다. 고신(拷訊) 기한이 다 된 다음에 다시 엄하게 형장을 쳐서 기어이 진상을 알아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이에 고종이 전교하였다.

"이 죄수는 단지 횡령하는 죄만 범한 것이 아니라 백성을 학대한 일도 많아서 호남의 소요가 이 지경에 이르게 하였으니 가볍게 처리하여서는 안 된다. 다시 엄하게 한 차례 형장을 치고 속히 원악도(遠惡島)에 안치하는 형전을 시행하여 당일로 압송하라."

그리하여 조병갑은 고금도로 유배 가서 1년 2개월간 유배 살았다. 1895년 7월에 고종은 조병갑을 대사령(大赦令)으로 민영준 · 조병식 등 279명과 함께 사면하였고, 1898년 1월 2일에 법부 민사국장에 임명하였다. 1898년 5월에 조병갑은 고등재판소 판사를 겸임하여 동학교주 최시형 재판을 담당하였다. 
 

고종은 정말 너그럽다. 탐관오리이자 국가적 사건을 일으킨 자를 다시 등용하여 재판관을 시키다니. 한마디로 조선은 총체적 부패국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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