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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곤칼럼>영국인이 본 조선 사회 부패 (2)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황제의 칙령은 곧 법이고 의지는 절대적이었다!!
등록날짜 [ 2021년01월03일 10시23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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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숍 여사는 1896년 10월에 네 번째로 조선에 들어왔다. 그녀는 조선에서 5개월 지내다가 1897년 3월에 조선을 떠났다, 이 시기에 고종은  1896년 2월11일에 아관파천하여 1년간 러시아 공사관에서 지내다가 1897년 2월 20일에 경운궁(지금의 덕수궁)으로 환궁하였다.  

그녀는 고종을 경운궁에서 세 번이나 만났는데, 당시 조선 상황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왕은 러시아 공사관에서 손님으로 1년 이상 있었다. 이것이 그의 신하들에게 가장 못마땅한 일이었다. 국왕이 외국의 보호 아래 있는 것은 국가적인 수치라고 신하들이 생각하는 것은 당연했다. (중략)


왕은 러시아 공사관에서 자유를 즐기는 동안 조선에는 이익되는 일이 없었다. (중략)

구시대의 악습이 매일 벌어지고 대신과 다른 총신들은 뻔뻔스럽게 관직을 팔았으며, 왕의 총신 가운데 한 사람에게 특별히 비난이 쏟아지면 그의 추방을 위한 공식적인 요구는 그를 학부의 협판(차관)으로 바꾸는 것으로 해결되었다.    

반항적인 관료와 1895년 8월 8일의 불법적인 내각(제3차 김홍집 내각)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때때로 비양심적인 왕비의 간섭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일본의 지배로부터 자유로워짐으로써 자신의 신변이 안전하다는 사실을 발견한 왕은 그의 왕조의 가장 최악의 전통으로 되돌아갔다. 신하들의 어떤 견제에도 불구하고 그의 칙령은 곧 법이 되었으며 그의 의지는 절대적이었다.”(비숍 지음 ·신복룡 역주,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 p 438-443)

 
비숍의 ‘비양심적인 왕비의 간섭’이란 표현이 날카롭다. 그녀는 서문에서 밝혔듯이 객관적 서술을 하고 있다.  
글은 이어진다. 

 “이제 권력은 국왕을 둘러싸고 왕의 위엄과 탐욕을 등에 업은 사람들의 몫이 되었으며, 아관파천에서 공을 세운 박상궁과 엄상궁의 뜻대로 행사되었다. 왕의 총신들과 아첨꾼들은 그들의 친척들에게 벼슬을 주면서도 국왕의 우유부단함을 이용하는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다. ... 국왕은 끝없이 ‘주시옵소서, 주시옵소서’ 소리만 외쳐대는 기생충 같은 무리와 식객들로 둘러싸여 있었기 때문이다.”

 
아관파천에서 공을 세운 박상궁과 엄상궁 중 박상궁이 누구인지 알 수가 없다. 엄상궁은 1897년에 영친왕을 낳은 엄귀비이다. 엄상궁은 8세 때 입궐하여 나인이 되어 민왕후를 모시던 중 고종의 승은을 입은 것이 발각되어 민왕후에 의해 쫓겨났다가, 1895년 음력 8월 20일 을미사변으로 민왕후가 시해된 지 5일 만에 입궐하여 고종의 총애를 받았다. 비
숍의 글을 계속 읽는다.

“남자들은 아무런 이유 없이 감옥에 들어가고, 하층민 가운데 어떤 사람은 총리대신이 되고, 김옥균을 죽인 자객은 홍문관 교리가 되고 (홍종우를 말함- 필자주 ), 독직 사건으로 유죄판결을 받은 사람은 법부대신이 되었다.


부정한 매관매직이 더 심해지고, 예산을 장악한 사람이 내장원경이 되고 며칠만 권력을 잡아도 당상관에 오를 뿐만 아니라 무일푼이었던 친척과 친구에게 일확천금을 안겨주고, 사소한 비판만 하여도 관직을 잃은 것이 관례가 되어 행정은 커다란 혼란에 빠졌다.

좋은 뜻에서 시작되었지만 항상 비척거리는 군주는 어떻게 나라를 다스릴지를 모르고 있다. 왕의 호의를 믿고 우호적인 활동을 한다는 것은 늘 무의미한 것이 되어 탐욕스러운 기생충들의 먹이가 되었다.


외국 모험가들의 도구는 지속성을 깨뜨림으로써 훌륭한 통치기구를 마비시키고 음모자들의 이해관계에 빠진 무분별한 사치에 동의 함으로써 경제와 재정의 개혁을 어렵게 하거나 단절하게 만들었다. 왕은 공사관의 지붕 밑에서 자유를 얻은 이래 단행했던 바와 같은 통치권의 변화를 단행하지 못했다.

 나는 왕의 이러한 약점을 기록하는 것이 유감스럽다. 개인적으로 나는 왕이 모든 외국인에게 그렇듯이 예의바르고 친절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는 상냥한 성격의 소유자이며 어느 정도의 애국심도 가지고 있다고 나는 믿는다.


그러나 그는 조선의 현재와 미래에 대해 가장 중요한 요소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그의 성격이나 조선을 불행으로 이끄는 그의 통치술에 대한 언급없이 그냥 지나치는 것은 정직하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굳이 정상을 참작한다면 그는 특별히 가르침을 받은 500년에 걸친 왕실 전통의 산물이다. 공공사업과 국가의 이익은 다만 국왕이 벼슬을 주고 측근에게 봉급을 지급하는 것이며, 정치란 대신들을 서로 싸우게 하여 힘을 빼는 것이라고 배웠을 뿐이다.


(불현듯 선조가 생각난다. 선조는 동인과 서인을 번갈아 힘을 빼다가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는 국난을 겪었다.- 필자 주)” (위 책, 제36장 ‘1896년의 서울’, p 443-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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