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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곤칼럼>외국인이 본 대한제국의 매관매직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매관매직은 공직 사회를 썩게 하였고 망국을 재촉했다.
등록날짜 [ 2021년01월06일 10시20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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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7년 10월에 탄생한 대한제국 시대에도 매관매직 풍조는 여전했다. 오히려 1894년 갑오개혁 이전보다 훨씬 더 심했다. 매관매직은 공직 사회를 썩게 하였고 망국을 재촉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광무개혁을 추진한  대한제국은 1905년에 을사늑약 체결로 외교권 박탈이란 치욕을 남겼다.


# 청나라 공사 서수붕의 비웃음 
 
1900년 12월에 청나라 공사 서수붕이 중국으로 돌아가고 참찬관 허태신이 공사서리로 임명되었다. 그런데 서수붕은 고종의 매관매직을 비웃었다.  “1898년 12월에 부임한 서수붕이 처음 고종을 뵈었을 때 조선의 기수(氣數)가 왕성하고 풍속이 아름답다고 대단히 칭찬했다.

고종이 의아하게 여기고 그 연유를 물으니 그가 대답했다. ‘본국은 매관매직(賣官買職)을 한 지 십 년도 되지 않아 천하가 크게 어지러워지고 종묘사직이 거의 위태로울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귀국은 매관매직을 한 지 30년이 되어도 제위(帝位)가 아직도 건재하니 기수가 왕성하지 않거나 풍속이 아름답지 않고서야 이럴 수 있겠습니까?’

이때 고종은 크게 웃음을 터뜨리면서 부끄러워할 줄 모르자, 서수붕은 밖으로 나가 사람들에게 말했다. ‘슬프구나, 대한의 백성들이여’”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데이터 베이스, 국역 『매천야록』 제3권 1900년 ③ :  61. 청국공사 서수붕의 귀국) 

#  영국인 해치의 비평

영국의 기업가로 국회의원을 지낸 어니스트 해치는 1901년 무렵에 조선과 일본 그리고 청나라를 방문한 뒤 쓴 『극동의 인상 : 일본 ·코리아 ·중국』에서 조선 관료제의 부정적인 측면을 신랄하게 꼬집었다.

“정부의 부패와 비효율은 오래전부터 뛰어넘기가 불가능한 지점 이상에 도달했으며, 인민은 실정(失政)에 익숙해져서 그것을 자연스럽게 여길 뿐 반대하여 싸우려고 하지도 않는다. ... 조선의 관료제는 이 나라의 심장부를 차지한 채 이 나라의 생피를 빨아 마시는 흡혈귀다.”(조윤민 지음, 두 얼굴의 조선사, 글항아리, 2016, p 178-179)

해치의 평가는 영국의 지리학자 비숍 여사가 1897년에 쓴 책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에 나오는 ‘허가 받은 흡혈귀(양반 계층)’를 연상케 한다. 

# 1903년 웨베르의 방문 소감

1885년부터 1897년까지 12년간 러시아 공사로 재직한 노회한 외교관 웨베르가 1903년에 대한제국을 방문했다. 1896년에 아관파천을 주도한 그는 방문 소감을 남겼다.

“서울에 5년 만에 다시 와 보니 거리의 남루한 복장이 이전보다 두 배나 많았다. ... 고종 황제는 무당을 불러 굿을 하는 엄비(영친왕의 생모)를 따라 미신을 신봉하고 있었다. 황제는 아주 호감을 주는 인물이지만 많이 쇠약해져 있었다. ... 정치적 상황은 더욱 악화되고 있었다. 일본인들이 다시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한국인은 러시아, 일본 기타 열강의 국제관계 및 그들의 정치적 의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으며 나라가 아떤 처지에 놓였는지 제대로 몰랐다. ...
관직은 강대국과 종속관계에 놓여 독립심이 박약하고 의타심이 강하다. 관직은 공적과 능력에 따라 임용되지 않고 뇌물의 액수에 따라 결정됐다. (후략)” (강준만 지음, 한국 근대사 산책 4, 인물과 사상사, 2007,  p 19)



# 헐버트가 본 매관매직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된 후 고종 황제의 밀사로 미국 워싱톤과 네델란드 헤이그에서 국권 회복 운동에 힘쓴 ‘파란 눈의 애국자’ 헐버트는 1906년에 발간한 『대한제국 멸망사 The Passing of Korea』 ‘제3장 정치제도’에서 매관매직을 비판했다.

“19세기 초기에 정치에서 돈이 그 위력을 발휘하기 시작했으며 관직에 등용되는 데 돈의 구실이 그 어느 때보다도 컸다. ... 관직은 일반상품과 마찬가지로 사고팔았다. 모든 관직은 그 가격이 결정되어 있어서 도의 관찰사는 미화로 5만 달러, 방백 수령들은 500달러 정도였다.


그 자리가 서울이라면 미관말직일지라도 상당한 수입이 생겨서 욕심을 채우기에 충분했고, 세력가들은 매관에서 나오는 엄청난 수입을 더욱 증가하고자 재임 기간을 짧게 해 상납의 횟수를 빈번하게 했다.  

물론 각 관찰사나 방백 수령들은 자기의 짧은 재임 기간에 자기가 상납한 밑천을 뽑고 또 자기의 안락한 생활을 계속하기 위해서 백성에게 과중한 과세를 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에 매관매직에서 거래되는 돈이란 결국 백성들이 부담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헐버트 지음 · 신복룡 역주, 대한제국 멸망사, 집문당 2019, 제3장 정치제도 p 60-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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