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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곤칼럼>을사늑약 전야 (5)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 11월 15일, 고종과 이토 단독 회담하다.
등록날짜 [ 2021년02월02일 18시43분 ]

포츠머스 조약 체결된 지 두 달 정도 된 1905년 11월 2일에 추밀원 의장 이토 히로부미(1841∽1909)는 메이지 천황의 부름을 받았다. 천황은 이토를 특파대사(特派大使)로 임명했다. 이토는 천황의 친서를 가지고 11월 8일 오후 5시에 부산에 도착했다.


9일 오전에 이토는 대한제국 황실이 마련한 궁정 열차를 타고 경성으로 향했다. 오후 6시 20분 경성역에 도착한 이토는 정동의 손탁호텔에서 여장을 풀었다.
그런데 11월 5일에 송병준이 주도한 일진회는 “한국의 외교권을 일본에 위임하는 것이 독립을 유지하고 영원히 복을 누리는 길”이라는 선언서를 발표했다.


정말 을사오적보다 더 나쁜 ‘매국노’였다. 
이토는 11월 10일 12시 30분에 경운궁 수옥헌 (지금의 중명전)에서 고종황제를 알현하였다. 그는 고종에게 메이지 천황의 친서를 전달했다.


친서의 핵심은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이겨 다행히 평화를 회복하게 되었으나, 이를 더욱 항구히 유지하여 동아시아 장래의 불안 요소를 없애기 위해서는 두 제국 간의 결합을 한층 공고히 하는 것이 극히 긴요하다.’는 것이었다.

이어서 이토는 3-4일 이내에 다시 알현할 것을 청했다. 이에 고종은 면담 일정을 알려주겠다고 답변했다. 
 

내알현은 11월 15일로 예정되었다. 그동안 고종은 대응 논리를 구상하면서 내내 고심하였다. 대한제국은 1904년 2월에 ‘한일의정서’가 체결됨으로써 사실상 일본의 보호국이 되었다.


게다가 1904년 8월에 이른바 ‘제1차 한일협약’ 체결로  대한제국의 재정 ·외교·군사 등이 일본이 추천한 고문들에 의해 장악되었다. 고문(顧問) 정치였다. 이런 상황에서 ‘두 제국 간의 결합을 한층 공고하게’ 한다는 것은 도대체 무슨 뜻인가?

11월 15일 (수) 오후 3시에 고종과 이토는 수옥헌 내실에서 비공식적인 단독 회담을 하였다. 장소는 비공식적인 내실이었고, 배석자도 통역을 담당할 박종화와 고쿠분 뿐이었다.     

간단한 인사가 끝난 후 고종이 먼저 운을 떼었다. “경이 이번에 사명을 띠고 다시 왔음은 충심으로 다행으로 여기는 바이다. 짐은 신료는 물론 친족에게 한 번도 입 밖에 내지 않았던 것들을 감히 경에게 기탄없이 털어놓으려 한다. 청컨대 양해 바란다.”

이러자 이토는 “폐하께서 기탄없이 말씀하신다니 깊이 감사드립니다. 외신(外臣) 역시 정성을 다해 응답하고자 합니다.”라고 답했다. 이어서 고종은 말문을 열어 1895년의 을미사변을 거론했다.

“이노우에 백작이 임무를 마치고 떠난 지 열흘도 되지 않아 우리나라에 애통하고 또 대한제국과 일본의 교의에 장애를 주는 불행한 사건이 일어났다. ... 생각이 이에 미치면 문득 개탄스럽지 않을 수 없다. 그렇지만 이는 이미 지난 일에 속하고 지금 이를 반복해야 아무런 이익이 없다. 그러므로 지난 일은 잠시 잊고자 한다.”

이토는 민왕후를 시해한 을미사변과 직간접적으로 연루된 인물이었다. 을미사변 당시에 이토는 총리대신으로 미우라 고로를 주한일본공사로 보낸 장본인이었다. 이를 잘 알고 있는 고종은 을미사변을 들먹여 기선을 제압하려고 한 것이다.

이어서 고종은 제1차 한일 협약의 문제점과 그로 말미암아 파생되는 문제점을 장황하게 이야기했다. 재정과 국방의 문제점에 대하여 이야기한 다음 외교관계를 일본이 인수한다는 풍설에 대하여 언급하면서 인심이 한층 의구심을 가지고 불평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는 고종과 대한제국 신민들의 인내가 한계에 이르렀음을 은근히 알리는 표현이었다.

이렇게 고종이 상당히 길게 말하는 동안 이토는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드디어 고종의 말이 끝나자 이토가 첫 말을 했다.

“여러 가지 폐하의 불만스러운 실정에 관한 말씀의 취지는 자세히 알았습니다. 그런데 폐하께 시험삼아 묻겠습니다. 한국은 어떻게 해서 오늘에 생존할 수 있었는지, 또한 한국의 독립은 누구 덕택이었는지, 가장 중요한 일은 이것입니다. 폐하는 이것을 아시고도 그렇게 불만의 말씀을 흘리시는 것인지요?”

이토는 고종에게 따지듯이 물었다. 그는 을미사변이나 제1차 한일협약에 대하여는 아예 언급하지 않고 고종의 허점을 깊숙이 찌른 것이다.  ( 신명호 지음, 고종과 메이지의 시대, 역사의 아침, 2014, p 2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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