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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곤 칼럼>을사늑약 톺아보기 (14)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지금 만 번 죽음을 무릅쓰고 다시 대궐 뜰에서 호소하자'
등록날짜 [ 2021년04월22일 21시18분 ]

1905년 11월 26일에 궁내부 특진관 조병세 등이 외부대신 박제순 등을 참형에 처하라고 상소하였다.
 

"신들은 정부 대신들이 일본 공사가 요청한 사안을 가지고 제멋대로 가부(可否)를 결정지어 조인까지 하였다는 말을 듣고서 놀라서 넋을 잃고 몸 둘 바를 몰랐습니다. 다행스럽게도 폐하는 뜻이 확고하여 여러 번 협박을 받고서도 끝내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아, 노예로 유린당할 참화가 목전에 닥쳐 종묘사직이 폐허가 되고 백성들이 도륙당할 것이니, 아! 통분합니다. 외부대신 박제순의 죄를 어떻게 다 규탄할 수 있겠습니까? 자신이 일을 주관하는 대신이 되었으면 설사 폐하가 윤허하며 조인하게 한다 해도 죽기로 간쟁하여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고 신하된 직분을 다해야 옳은데 폐하의 뜻을 받들지 않고 제멋대로 조약을 체결하였습니다.


나라를 팔아먹은 역적이 어느 시대엔들 없었겠습니까만 이처럼 혹심한 역적이 어디 있었겠습니까? 천하의 일로 말하면 명분을 바로 세우는 것이 급선무이니 폐하가 이 역적을 처단하지 않는다면 안으로는 만인의 한결같은 울분을 씻을 수 없고 밖으로는 천하만국의 공론(公論)에 사죄할 수 없습니다.

바라건대, 분연히 노기를 떨쳐 속히 박제순의 목을 베어서 길에 걸어놓고 그 밖의 조인에 찬성한 신하들도 모두 매국에 이골이 나고 습관이 된 자들이니 나라의 법에 반드시 의리로 단죄해야 할 자입니다. 주모자와 추종자를 구별하지 말고 모두 의금부로 하여금 벼슬을 파면시키고 잡아다 구류하여 정형(正刑)을 시행해야 합니다.

다시 곧은 절의를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는 신하를 선발하여 외부의 장관으로 직접 임용해서 각 국의 공사관에 성명을 하고 각 국의 공사들을 초청해서 처음에 맹세한 것을 나중에 저버리고 제멋대로 위협해서 강제로 조약을 체결하였다는 사실과 임금의 재가와 수석 대신의 인준도 거치지 않았으므로 조약이 역시 효력이 없다는 내용으로 회동(會同)에서 담판하게 하며 해당 조약문건을 다시 물리고 시행하지 않음으로써 국권을 회복하고 백성과 종묘사직을 보존시키소서."

이러자 고종이 비답하였다. "높고 낮은 관리들의 계(啓)가 날마다 올라오니 어찌 공분이 온 나라 사람의 똑같은 마음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모르겠는가? 또 자세히 헤아려야 하지만 헤아려서 조처한 바가 있으니 경들은 이해하고 집으로 돌아가라." (고종실록 1905년 11월 26일 1번째 기사) 

원로대신 조병세(1827~1905)는 을사늑약 소식을 듣고 경기도 가평에서 서울로 올라왔다. 그는 1859년(철종 10) 문과에 급제하여 1877년 대사헌, 1887년 공조판서를 거쳐 예조·이조 판서, 1893년에는 좌의정에 올랐다.

1893년 3월 25일 고종이 보은집회의 동학교도들을 청나라 군대를 불러들여 진압하자고 했을 때 좌의정 조병세는 극구 반대했다. 1905년 3월 7일에 태의원 도제조에 임명된 78세의 조병세는 고종을 알현했다. 이 자리에서 그는 다섯 가지 시정개혁안이 한 가지도 실천되지 못한 것에 대하여 따질 정도로 소신파였다. 

11월 27일에 고종은 조병세와 이근명에게 물러가도록 명했다. “궁내부 특진관 조병세, 태의원 도제조 이근명 등에게 칙유하였다. ‘경 등의 충성스럽고 사랑에 넘치는 노성한 견해와 근심하고 분해하는 일치된 논의를 놓고 누군들 그렇지 않다고 하겠는가마는 거기에는 또한 짐작하여 헤아린 바가 있다는 내용을 비답과 칙유로 돈독하게 밝혔으니 아마도 거의 이해할 줄 알았었는데 아직도 밤낮으로 대궐 안에 머물러 있으면서 계속 명을 어기니 이것이 무슨 꼴이며 이것이 무슨 도리인가? 경들은 즉시 서로 이끌고 집으로 돌아가라.’ ”(고종실록 1905년 11월 27일 1번째 기사)

하지만 조병세와 이근명이 명령에 불응하고 대궐 뜰에서 호소하였다. “비서감 승(丞) 홍재봉이 서면으로 아뢰었다. ‘삼가 폐하의 유지를 받들어 궁내부 특진관 조병세, 태의원 도제조 이근명에게 전달하였더니 그들이 아뢰기를, ‘신들이 특별히 칙유하신 것을 삼가 받아보니 말이 매우 엄하고 심지어 명을 어긴다는 말씀까지 있으므로 두려운 생각이 마음속에 가득 차서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지금 나랏일이 위태롭고 급해서 다른 것을 돌아볼 겨를이 못되므로 지금 만 번 죽음을 무릅쓰고 다시 대궐 뜰에서 호소하자고 하였다.’라고 하였습니다.‘ ”(고종실록 1905년 11월 27일 2번째 기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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