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영환이 자결한 다음 날인 12월 1일 특진관 조병세(1827∽1905)가 을사늑약에 분개해서 약을 먹고 순국했다. 향년 79세였다.
조병세는 가평 시골집에 추방되었으나 11월 30일에 다시 상경하여 12월1일에 심순택, 이근명과 함께 을사늑약을 맺은 대신들을 처벌하라고 상소하였다.
"삼가 비지(批旨)를 받아보니, ‘이렇게 번거롭게 반복하는 것은 서로 면려하고 수성(修省)하는 것만 못하니 힘쓸 것은 자강(自强)에 있다.’고 하시고, 이어 집으로 돌아가라고 명하셨습니다.
출처 나무위키 조병세(1827∽1905)
신들이 집에 물러가 있다 해도 근심에 휩싸여 통탄의 눈물을 흘릴 따름이며 문을 닫고 자결할 따름인데, 폐하께서는 장차 어떻게 신들에게 권면하며 신들은 또 어떻게 폐하에게 권면하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오늘 즉시 칙지를 내려 역적을 치소서. 삼가 살피고 서둘러 시행하소서."
이러자 고종이 비답하였다. "공연히 번거롭게 할 필요는 없다. 경들은 그리 알고 집으로 돌아가라." 이윽고 조병세는 가마에 태워 강제 추방되자 가마 안에서 음독하여 조카 조민희의 집에 당도하여 죽었다. 조병세가 순절했다는 소식을 듣고 고종이 조령(詔令)을 내렸다.
"이 대신의 돈후한 천품과 굳은 지조를 두루 중앙과 지방에 시험하니 명성과 업적이 무수히 드러났으며 조정에 벼슬하여서는 모두 그 위풍을 우러러보았다. 그리하여 짐은 큰집을 버텨주는 기둥과 대들보처럼 의지했었고 이 어려운 때에 직면하여서는 더욱 마음을 의탁했었는데 갑자기 이처럼 부고가 이르렀다.
굳은 충성심을 가지고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충정은 후세에 빛날 것이지만 짐의 슬픈 심정을 어찌 다 말할 수 있겠는가?
졸(卒)한 특진관 조병세의 상(喪)에 동원부기(東園副器) 1부(部)를 실어 보내고, 궁내부에서 1등급의 예장(禮葬)을 기준으로 지급하여 겸장례(兼掌禮)를 보내 호상(護喪)하게 하고, 장사(匠事)는 영선사)에서 거행하게 하라. 예식원에서 정문(旌門)을 세우고 시호를 주는 은전을 시행하게 하되, 시장(諡狀)을 기다릴 것 없이 정문을 세우기 전에 시호를 의논하도록 하라.
성복(成服)하는 날 정경(正卿)을 파견하여 치제하게 하되 제문은 마땅히 친히 지어서 내려 보낼 것이며, 모든 관리들은 나아가라. 그리고 각종 비단 10필(疋), 무명과 베 각각 5동(同), 돈 1,000환(圜), 쌀 30석(石), 전칠(全㓼) 1두(斗)를 특별히 보내라. 또한 비서 승(祕書丞)을 보내 자식들을 구휼하고 오게 하라."
이어서 고종은 조병세에게 충정(忠正)이라는 시호를 내렸다.(고종실록 1905년 12월 1일 3번째 기사) 이날 종1품 이용직이 그의 장인 조병세가 남긴 상소문을 올렸다.
"신의 장인인 원임 의정(原任議政) 조병세가 오적을 처단하고 새 조약을 파기하는 일에 대해 유서로 남긴 상소문의 초본이 있어 의리상 차마 없애버릴 수 없어 이에 감히 봉해 올립니다. 삼가 바라건대 황상께서는 이 글을 두고 잘 살펴 결연히 소청을 준허하여, 종묘사직과 백성들을 보전할 계책을 완수하시어 죽은 사람이 유감이 없게 하소서."
다음은 조병세가 남긴 상소문이다. "신이 늘그막에 죽지 못하여 국가의 위망(危亡)이 목전에 임박한 것을 목격하고, 병든 몸을 끌고 도성에 들어와 주사(奏辭)와 차자(箚子)를 올려 여러 번 번거롭게 해드리면서 그칠 줄을 모른 것은 혹시 일말이나마 나라를 구원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중략)
현재 나라가 망하는 것이 당장 눈앞에 임박하였는데도 폐하께서는 단지 4, 5명의 역신(逆臣)들과 문의해서 일을 주선하니 비록 망하지 않으려고 한들 그럴 수 있겠습니까? 신이 폐하 앞에서 한 번 죽음을 결단하지 못하고 심지어 저들의 위협을 받아 잡혀감으로써 나라를 욕되게 하고 자신을 욕되게 하여 스스로 크나큰 죄를 자초했으니, 이것이 어찌 죽을 날이 장차 임박하여 하늘이 그 넋을 빼앗아서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신은 폐하의 죄인일 뿐 아니라 절개를 지키고 죽은 신 민영환의 죄인이기도 합니다. 신이 무슨 낯으로 다시 천지 사이에 서겠습니까? 신은 죄가 중하고 살아서는 폐하의 뜻을 감동시켜 역신들을 제거하지 못하고 강제 조약을 파기하지 못한 만큼 죽음으로 나라에 보답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감히 폐하와 영결합니다.
신이 죽은 뒤에 진실로 분발하고 결단을 내려, 박제순·이지용·이근택·이완용·권중현 오적을 대역부도(大逆不道)의 죄로 논하고 코를 베서 처단함으로써 천지와 신인(神人)에게 사례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곧 각국의 공관과 교섭해서 허위 조약을 회수해 없앰으로써 국운(國運)을 회복한다면 신이 죽은 날이 태어난 날과 같을 것입니다.
신은 정신이 어지러워 하고자 하는 말을 다하지 못합니다. ... 신은 피눈물이 흐르고 목이 메는 것을 금치 못하며 삼가 자결한다는 것을 아룁니다."
이에 고종이 비답하였다. "조특진관이 남긴 상소를 보고 더욱 마음이 슬퍼진다. 어찌 마음속에 새겨두지 않겠는가?"(고종실록 1905년 12월 2일 3번째 기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