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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곤칼럼>을사늑약 톺아보기 (22)

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고종의 친위대, '한일의정서 조약 체결' 극력 반대
등록날짜 [ 2021년05월17일 14시56분 ]

1905년 12월 16일에 이완용등 을사오적은 자신을 변명하는 상소를 올렸다. 21회 글에 이어서 상소를 읽어보자.

“더구나 이것(을사늑약)은 오늘 처음으로 이루어진 조약이 아닙니다. 그 원인은 지난해(1904년)에 이루어진 의정서(議定書)와 협정서(協定書)에 있고 이번 것은 다만 성취된 결과일 뿐입니다.

가령 국내에 진실로 저 무리들처럼 충성스럽고 정의로운 마음을 가진 자들이 있다면 마땅히 그 때에 쟁집(爭執)했어야 했고 쟁집해도 안 되면 들고 일어났어야 했으며, 들고 일어나도 안 되면 죽어버렸어야 했을 것인데 일찍이 이런 의거(義擧)를 한 자를 한 사람도 보지 못하였습니다.

출처 나무위키 을사오적

어찌하여 중대한 문제가 이미 결판난 오늘날에 와서 어떻게 갑자기 후회하면서 스스로 새 조약을 파기하고 옛날의 권리를 만회하겠다고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일이 성립될 수 없다는 것은 오히려 말할 것도 없고 나중에는 국교 문제에서 감정을 야기시키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니, 어찌 염려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완용 등은 궤변을 늘어놓는다. 을사늑약은 1904년 2월 23일의 한일의정서와 8월의 한일신협약의 연장선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때 쟁집한 사람, 상소한 사람, 순절한 사람, 의거한 사람 한 사람도 보지 못했다고 강변한다. 이는 궤변 중 최악의 궤변이고, 가짜 뉴스의 극치이다. 

1904년 2월 23일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의  체결과정을 살펴보자. 주한 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는 1903년 10월부터 한일군사동맹조약 체결을 추진했다. 이는 러일전쟁 개전을 앞두고 군사 전략상의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야시는 정부 고관들의 협조가 필수적이라 생각하고 고종 황제와 그 측근들의 독단적 정국 운영에 불만을 품고 있던 고관들을 포섭했다. 그들은 외부대신 이지용과 군부대신 민영철, 이근택 등이었다. 이지용등은 이용익 등 황제 측근 세력의 반대를 무마하기 위해 로비 자금 1만 원(지금으로 환산하면 13억 원 정도)이 필요하다고 일본 측에 요구하여 돈까지 받았다.

그런데 1904년 1월 21일에 고종은 중국 즈푸에서 전시중립선언 전격 발표했다. 이용익이 극비리에 지휘하고 현상건 이학균등이 실무를 맡았다. 이러자 교섭은 중단되었다. 하지만 2월 8일에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2월9일에 일본군은 서울에 주둔했고 2월 10일에 파블로프 주한 러시아 공사가 대한제국에서 철수해버리자 하야시는 고종에게 한일군사동맹조약 체결을 압박했다. 결국 고종은 2월 13일에 외부대신 이지용을 일본 공사관에 보내 재개하게 했다.


고종은 러일전쟁이 일본에게 유리하게 전개되고 있고, 중립화 선언도 효과가 없게 되자 어쩔 수 없이 일본 측과 동맹조약을 체결하기로 결심한 듯했다.
그러나 친러파 이용익은 일본과 조약을 체결했다가 나중에 러시아가 승리하면 곧바로 대한제국 병탄의 이유가 된다며 강력히 반대했다.

러시아군이 안주와 평양 부근에서 승리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고종도 러시아가 승리할 가능성을 기대하면서 현상건· 이학균 등 측근들을 불러들이는 등 조약 체결을 연기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이용익은 2월 22일에도 외부대신 이지용을 찾아가 만일 일본과 조약을 체결하면 대역죄인으로 처분받을 것이라고 엄포를 놓았다. 이지용은 후환이 두려워 조인을 거부하고도 싶었지만, 그럴경우 일본 공사관 측으로부터 받은 로비 자금이 문제가 될 판이었다.

그런데 일본은 2월 22일에 이용익을 전격 납치하여 일본으로 압송하였고, 육군참장 이학균 그리고 육군참령 현상건 등을 연금했다. 그럼에도 이지용은 2월 23일에 아침 서울 밖으로 도주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이를 미리 안 하야시는 이를 막고 12시에 전문 6조의 ‘한일의정서’ 조인에 성공했다. (서영희 지음, 일제침략과 대한제국의 종말, 역사비평사, 2012,p 29-36)
이를 보면, 한일의정서 체결과정에서 쟁집(爭執)한 사람이 없었다는 이완용 등의 주장은 명백한 가짜 뉴스이다. 친러파 이용익등 고종의 친위대가 조약 체결에 극력 반대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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