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11월27일sat
 
티커뉴스
OFF
뉴스홈 > 사설ㆍ칼럼 > 김세곤칼럼
kakao 트위터로 보내기 싸이월드 공감 네이버 밴드 공유
쪽지신고하기 기사글확대 기사글축소 기사스크랩 이메일문의 프린트하기

<김세곤칼럼> 해방정국 3년 (3)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 김일성의 등장
등록날짜 [ 2021년08월29일 19시49분 ]

북한 현대사의 중심은 단연 김일성(본명 김성주 1912~1994)이다. 주체사상을 바탕으로 1인 독재체제를 만들어 김정일, 김정은 세습체제를 확립한 김일성은 소련의 든든한 지원을 받아 해방 후 혜성같이 나타났다.

1945년 8월 하순 어느 날, 스탈린은 소련군 극동군 총사령관 바실레프스키에게 북한을 이끌어갈 지도자를 추천하라고 긴급 지시를 내렸다.  바실레프스키는 소련 극동군 산하 88특별여단 소속의 김일성 대위를 추천했으며, 9월 초순 스탈린은 합격판정을 내렸다. (강준만 저, 한국 현대사산책 1940년대편 1권, p 52)

9월 19일에 김일성은 소련 군함을 타고 김책, 최용건 등과 함께 원산으로 귀국했다. 9월 22일에 평양에 도착한 김일성은 소련군의 지원을 받아 공산당 조직에 착수했다. 김일성은 제25군 사령관 치스차코프, 군사위원 레베데프등 소련군 간부를 평양의 고급요정으로 초청해 친밀감을 높였다.  

9월 28일에 조선공산당 평남지구위원회 책임비서 현준혁이 암살되었다. 현준혁은  ‘한국의 간디’ 조만식과 함께 소련군 정치사령부 로마넨코 소장에게 들렀다가 트럭을 타고 돌아가던 중 평양시청 앞에서 괴한의 총격에 암살되었다. 남북한 최초의 정치암살이었다. (자료 : 한국민족대백과 사전)

10월 8일에 김일성은 개성 근처의 소련군 38 경비사령부에서 조선공산당 책임 비서 박헌영을 만났다. 1942년 12월 일본 경찰의 검거망을 피해 전라도 광주의 기와공장 인부로 몸을 숨기고 있던 박헌영은 해방이 되자 9월 3일에 조선공산당을 재건하고 여운형이 급조한 ‘조선인민공화국’을 장악하고 있었다.

저녁에 시작한 회담은 새벽에야 끝났다. 김일성은 조선공산당의 중앙은 평양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북한에 소련이 들어왔으니 공산주의를 실행할 수 있다는 논리였다. 박헌영은 한반도의 중앙은 서울이니 조선공산당의 중앙도 마땅히 서울이라고 맞섰다.


소련군 민정사령관 로마넨코가 김일성의 편을 들었지만, 결국 서울의 조선공산당을 중앙으로 인정하되 평양에는 조선공산당 북조선 분국(分局)을 두는 것으로 타협이 이루어졌다. (이렇게 처음 만난 두 사람은 1946년 9월에 박헌영이 월북하기 전까지 네 차례(1945년 12월, 1946년 4월, 6월,7월) 비밀로 회동하여 신탁통치, 미소공동위원회에 대한 대응, 공산당의 진로문제등 주요 문제를 논의했다. 그런데 박헌영은 6.25 전쟁 이후인 1955년 12월에 김일성에 의해 숙청되었다.)   

10월 10일에 평양에서는 조선공산당 서북 5도 책임자 및 열성자 대회가 열렸다.북한 지역 공산당 창당대회였다.(북한은 이날을 ‘조선로동당 창당기념일’로 기리고 있다.) 이어서 13일엔 조선공산당 북조선 분국이 세워졌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10월 14일에 평양에서 7만여 명의 군중이 참석한 가운데 조선 해방 축하 집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김일성이 처음으로 소개되었다. 소개자는 환영대회 위원장 조만식이었다. 그런데 군중들의 관심을 끈 것은 김일성의 연설이 아니라 그의 젊음이었다.


만주 벌판에서 축지법을 써가면서 일본 관동군을 무찔렀다는 전설의 영웅 김일성이 겨우 33세의 젊은 청년이란 사실에 군중들이 놀란 것이다. 이러자 ‘가짜 김일성’ 논란이 유포되었다.

한편 11월 3일에 북한의 우파 지도자인 조만식이 조선민주당을 창당했다. 당원 수는 50만 명에 이르렀다. 조선민주당의 인기가 시사하듯이 당시에 반소, 반공 운동이 고개를 들고 있었다.



11월 7일 함흥, 11월 18일 용암포에서 학생들과 공산당원 사이에 격투가 벌어졌고, 11월 23일에는 신의주 지역 학생 3,500여 명이 ”공산당을 몰아내자‘ 소련군은 물러가라.’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위에 나섰다.


시위의 배경은 소련군의 만행과 공산당의 독선에 있었다. 하지만 소련군은 무차별 사격을 하였고 학생 24명이 사망하고 700여 명이 부상당하는 대규모 유혈사태가 일어났다. 사건 이후 검거·투옥된 학생과 시민은 무려 2,000여 명에 달하였고, 학생 200명이 유형을 갔다.(강준만, 위 책, p 140 ; 안문석 지음, 북한 현대사 산책 1, 인물과 사상사, 2016, p 80-82)


이후 북한에서 우익은 발붙일 곳을 잃었고 남한으로 탈출했다. (남한에서 보는 좌우 대립은 북한에선 아예 존재할 수 없었다.)  

1945년 12월 17일에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제3차 확대집행위원회가 열렸다. 이 때 김일성은 책임비서로 선출되었고, 그는 북한을 하루빨리 조선 전체의 사회주의 혁명을 위한 ‘민주기지’로 키워야 한다고 선언했다. (강준만, 위 책, p 141) 이어서 김일성은 1946년 2월 8일에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위원장이 되어 북한 정부 최고책임자가 되었다.  

 

올려 0 내려 0
김세곤 이 기자의 다른뉴스보기
무통장입금 정보입력 입금자명 입금예정일자
(입금하실 입금자명 + 입금예정일자를 입력하세요)
[관련뉴스]
<김세곤칼럼>해방정국 3년 (4)
<김세곤칼럼>해방정국 3년 (2)
트위터로 보내기 싸이월드 공감 네이버 밴드 공유
기사글확대 기사글축소 기사스크랩 이메일문의 프린트하기
<김세곤칼럼>해방정국 3년 (4) (2021-09-04 21:04:31)
<김세곤칼럼>해방정국 3년 (2) (2021-08-22 11:54:08)
강항문화제 제2회 2021년 선비...
제2회 순천생활문화페스티벌 및...
광주시교육청, ‘학교로 찾아가...
광주시, 15개 주유소서 요소수 ...
광주시, 2021년도 기본형 공익...
김한종 전라남도의회 의장, '국...
‘제16회 전라남도 농업경영인...
현재접속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