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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은 강항의 역사적 현장을 직시(直視)해 보다!(佛甲寺重修勸文 편)

불갑산 주변고을로 羅州, 咸平, 光山, 靈光, 茂長, 珍原, 長城, 날로 수 십 명씩 되어 봄, 여름으로 글소리가 귀에 울려 퍼져.
등록날짜 [ 2021년10월11일 20시33분 ]

불갑사의 중수에 시주를 권하는 글(佛甲寺重修勸文)


먼저 원문 해석글을 소개한다.

武靈은 큰 군이다. 고을의 진산(鎭山 : 지방의 最巨山)은 母岳이니 여러 산의 마루(宗)가 되기 때문에 母라고 하는 것이다. 세상 사람이 부르기를 불갑이라고 하는데 佛寺의 마루가 되는 바이므로 甲이라고 하는 것이다.


산의 허리에 龍湫가 있는데 넓이가 수 백 평이요, 그 깊이는 밑을 알 수 없다. 신령스러워 용이 살고 있어 구름을 일으켜 비를 오게 한다고 하여 온 지방의 백성들이 그 이로움과 혜택을 본다고 한다.


그 북쪽의 골짜기가 족히 수백가구를 수용할 만한데 날아갈 듯 떨어지는 폭포 한줄기가 구름 속으로 부터 뛰어내려 돌 위에 흩어져 뿌려지는데 맑고 깨끗하여 거울 같다.


첩첩이 둘러싸여 겹쳐진 산봉우리들이 사면으로 에워싸고 있어 참으로 龍天入部가 지켜주는 곳이요, 洞天福地 洞天福地 : 산과 내에 둘린 경치좋은 곳과 복을 누리며 잘 살만한 땅의 하나다.


여기에 큰 사찰이 있어 그 규모가 5백여 칸에 이르니 승방이 7십 여 칸이요, 사원(寺院)과 회랑(回廊)이 둘러 있는 것이 4백 여 칸이다.


높이가 90자나 되는 법당은 백 여 명이 앉을 만 하였으니 비록 중국 楊州의 水西 揚州 : 江都, 중국 강?나 宣城의 開元 宣城 : 중국 安微城 남동쪽에 있는 도시. 宣城? 도 이 보다 장엄하거나 화려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애당초의 경영은 누가 해서 누구에게 전했는지 알 수 없지만 그 중창한 것은 노승이 법당의 서까래를 갈아 넣을 적에 그 상량문을 보니깐 커다란 글씨로 정원원년개조(貞元元年改造 : 785년, 통일신라 元聖王1)라고 쓰여 있었다고 하며, 高麗의 충렬왕조(忠烈王朝 : 1273-1308 재위)때에 王師 覺眞 覺眞(1270-1355) : 復兵, 호는 無能?이란 중이 있어 서울(京師)로부터 와서 지팡이를 세워 놓고 거처하자 그 제자 수 백 명이 절을 둘러서 절집을 만들었는데 그 골짜기에 능히 수용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가 죽자 正이 그를 위해 비석을 세웠는데 李學士 達衷 李達衷(?-1385) : 유학자, 자는 止中, 호는 ?이 왕명(製)에 용하여 銘 銘 : 학문 문체의 형식의 한가지, 대게 운을 넣어 넉자 한짝으로 귀(句)를 이루어 서술하는데 주로 자기자신을 경계하거나 남의 업적 또는 사물의 내력을 찬양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며 金石, 器物, 碑石 따위에 새김을 지었다는데 부러진 비석의 일그러진 글씨들이 지금도 사람의 입에 자자하게 오르내린다.


이 (불갑)산을 둘러싸고 있는 고을로 羅州, 咸平, 光山, 靈光, 茂長, 珍原, 長城이 있는데, 이 여러 고을의 백성과 선비들이 이 원사가 깨끗하고 시원스럽게 넓고 환하며 수석이 맑고 시가지가 먼 것을 사랑하여 책을 들고 와서 읽는 사람이 날로 수 십 명씩 되어 봄, 여름으로 글소리가 귀에 쟁쟁하도록 울려 퍼졌다.


산을 나가서 과거에 장원을 하여 나라에서 명성을 떨친 사람이 뒤를 이어 났으니 숨어서 수양할 곳이 있다는 것이 이렇듯 학문에 관련이 있는 것이다. 이는 五老峯의 白石菴이나 九江郡의 (중국)白鹿洞 白鹿洞 : 증극 江西道 星子?과도 그 아름다움을 짝할 만하니 어찌 불전(佛殿)이고 중이 거처하는 곳이라고 해서 쉽게 볼 수 있겠는가.


그리고 만일 해가 크게 가뭄이 들어 여러 山祭를 지내게 되면 고을 太守가 문무의 이속과 선비를 거느리고 와서 절에서 齋戒하며 자고 몸소 폭포에서 제사를 올렸다. 그리고 싸늘한 가을이나 따뜻한 봄날이나 온 고을 사람이 모두 모이게 되며 父老들이 자손과 형제들을 거느리고 강당에서 독법을 하고 문루에서 飮射 飮射 : 鄕射酒醴, 한 고을의 유생들이 모여 향약을 낭독하고 良風과 美俗을 진작하고 단결과 친목을 도모하기 위해 술을 마시며 잔치하는 예절도 했다.


그렇다면 이 절의 흥폐는 어찌 다만 중이나 불교신도들(만)의 기뻐하고 슬퍼할 바이겠는가. 그런데 불행히도 정유(丁酉 : 1597년)년의 난리에 흉악한 적도의 불길이 한번 스침으로서 殿堂이며 室房이 참혹하게도 먼지처럼 되어 버리니 목탁소리가 나지 아니하고 竹色도 진즉부터 죽어버리고 연못에 거북이만 나와서 햇볕을 쪼이고 소나무에 학만 돌아오니 이는 중과 보살들만 구슬퍼 할 바가 아니라 앎을 갖춘 사람들도 [禪宮이 한번 폐함에 세상일이 슬프다]는 한을 품게 되었다.


중 법릉(法稜)이 뭇사람과 의논을 하고 중창을 하기로 뜻을 굳히니 뭇사람이 묻기를 [이 절을 일으키려면 수십만 금의 재화가 아니면 안 될 것인데 比丘 比丘 : 고대 인도의 bhikhn의 音譯, 출가하여 具足戒를 받을 남자 중. 가지고 있는 금전과 재물이 얼마나 되며 재료를 구할 힘이 얼마나 되는가? 비구가 마을사람들에게 설득을 하려면 어떤 방도로 하려는가? 만일 서방극락의 인연과 업보로 말한다면 믿는 사람도 있고 안 믿는 사람도 있을 터인데 비구는 어떻게 하려는가?] 하였다.


법릉(法稜)이 말하기를 “나는 불자입니다. 불자가 이 불사를 짓는데 인연과 업보를 버리고 무엇으로 사람들에게 말하겠습니까? ”그러나 내말을 믿지 않은 분께는 사람의 정으로써 말씀드리겠습니다.


인정으로써 말씀드린다면 모든 노선생들이 반드시 “이 절은 내가 어렸을 때에 글을 읽던 곳이기에 없어진 것을 내가 서운해 하였는데 다시 지은 다는데 어찌 정이 없겠느냐”하실 것이요,


자손과 제자들은 반드시 “이 절은 우리 어르신이 글을 읽던 곳이기에 없어진 것을 내가 서운해 했는데 이제 다시 지은다고 하니 내가 어찌 정이 없겠는가?”할 것이며, 어린 아들을 둔 분은 반드시 “우리 애가 공부를 하게 되면 반드시 이 절에 가서 할 것이니 내가 어찌 돕지 않겠는가?”할 것이요,


동자들은 “내가 열다섯(成童)이 되면 반드시 이 절에 가서 공부를 할 것이니 내가 어찌 돕지 않으리요.”할 것이니, 그렇게 되면 금전과 재물이며 소와 말, 베와 비단, 옷가지와 음식을 반드시 아끼지 않을 줄로 압니다.


그 밖에는 내가 장차 인과로 타이르기를 “천당이 없다면 모르되 있다면 나를 도와준 분이 오를 것이요, 지옥이 없다면 모르되 있다면 나를 돕지 않은 사람이 들어갈 것입니다” 할 것이니 이렇게 하면 나와 뜻을 같이 하는 사람이 어찌 십 백 천명만 되겠습니까. 그렇게 되면 내가 이것을 창건하기가 무엇이 어렵겠습니까? 하였다.

 

뭇사람이 말하기를[옳네 옳아]하므로 이 말을 써서 글장(卷子)을 만들었노라.


천년고찰 불갑사의 주변 형국

지금까지 천년고찰 불갑사에 대해 여러 억측(臆測)이 난무(亂舞)했다. 그도 그럴 것이 제대로 된 기록이 없으니 더 그러하다. 오로지 사찰에 현존하는 불사(佛事)에 의한 자료밖에 다른 뾰쪽한 방법이 없다.


특히 조선은 국가이념이 숭유억불정책이었다. 무지한 백성들이야 쉽게 국가이념을 맹종하듯 따라간다고는 하나 그 국가 특히 조선은 유학을 중시했기에 선비가 국가를 좌우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선비집단에서 불가를 잘 활용하고 적당히 길들여 가고 있다는 세류(世類)가 분명 녹아 있는 흔적을 중수기문 곳곳에서 엿 볼 수 있어 신비롭다. 먼저, 수은은 불갑사의 산세(山勢)와 주변의 형국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산의 허리에 용추(龍湫)가 있는데 넓이가 수 백 평이요, 그 깊이는 밑을 알 수 없다. 신령스러워 용이 살고 있어 구름을 일으켜 비를 오게 한다고 하여 온 지방의 백성들이 그 이로움과 혜택을 본다고 한다.


천년고찰 불갑사의 규모

이어 수은은 불갑사의 규모와 건축물 크기가 중국이라는 대국에 견주어 조금도 밀림이 없을 정도로 장엄하고 화려하다는 걸 빼 놓지 않는다. 여기에 큰 사찰이 있어 그 규모가 5백여 칸에 이르니 승방이 7십 여 칸이요, 사원과 회랑이 둘러 있는 것이 4백 여 칸이다. 높이가 90자나 되는 법당은 백 여 명이 앉을 만 하였으니 비록 중국 楊州의 水西나 宣城의 開元도 이 보다 장엄하거나 화려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또, 수은은 불갑사의 최초 785년 통일 신라 시대의 상량문과 고려 충렬왕 때의 불갑사의 규모에 대해 골짜기까지도 사찰 또는 암자가 있었음을 암시한다. 상량문을 보니깐 커다란 글씨로 정원원년개조(貞元元年改造 : 785년, 통일신라 元聖王1)라고 쓰여 있었다고 하며, 高麗의 충렬왕조(忠烈王朝 : 1273-1308 재위)때에 王師 覺眞이란 중이 있어 서울(京師)로부터 와서 지팡이를 세워 놓고 거처하자 그 제자 수 백 명이 절을 둘러서 절집을 만들었는데 그 골짜기에 능히 수용하지 못했다고 한다.


천년고찰 불갑사의 기능과 중수를 해야하는 이유

수은은 이윽고 불갑사의 경계와 여러 고을의 선비들이 찾아와 사시사철 공부하기 좋고 아주 유명한 사찰(寺刹)이었다고 소개하고 있다. (불갑)산을 둘러싸고 있는 고을로 羅州, 咸平, 光山, 靈光, 茂長, 珍原, 長城이 있는데, 이 여러 고을의 백성과 선비들이 이 원사가 깨끗하고 시원스럽게 넓고 환하며 수석이 맑고 시가지가 먼 것을 사랑하여 책을 들고 와서 읽는 사람이 날로 수 십 명씩 되어 봄, 여름으로 글소리가 귀에 쟁쟁하도록 울려 퍼졌다.

 

이뿐 아니라 불갑사의 또 다른 기능으로 백성들을 위한 산신제나 기우제 등을 지내는 아주 성스러운 도장이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만일 해가(당해 년에) 크게 가뭄이 들어 여러 산제(山祭)를 지내게 되면 고을 太守가 문무(文武)의 이속(吏屬)과 선비를 거느리고 와서 절에서 제계(齋戒)하며 자고 몸소 폭포에서 제사를 올렸다.


<중략> 그렇다면 이 절의 흥폐는 어찌 다만 중이나 불교신도들만의 기뻐하고 슬퍼할 바이겠는가.
라며 드디어 수은은 불갑사의 중수기문을 짓게 된 연유(緣由)를 밝히고 있다. 수은 선생이 국가적으로 보나 사적(私的)인 입장에서 바라봐도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은 인생사에서 뼈에 사무치게 아프고 통한(痛恨)의 고통을 가져온 것을 거푸말하고 있다.


특히 모든게 먼지가 되어버리고 죽어버리고 한 번 폐함으로 세상이 다 슬프다고 강조해 말한다. 이 정유재란은 그동안 전쟁이 없었던 평화의 나라, 학문을 숭상하는 선비의 나라, 조선이 당시 호시탐탐 노리고 있던 왜국에게 무능한 군주 선조가 무방비 상태로 조선팔도가 도륙(屠戮)질 당한 아주 처참한 전쟁이었다.


급기야 이 전쟁은 세계전쟁으로 비화(飛禍)되며 어쩔 수 없었던 한·중·일로 번진 삼국의 세계전쟁이었다는걸 느끼게 한다. 정유(丁酉 : 1597년)년의 난리에 흉악한 적도(賊徒)의 불길이 한번 스침으로서 전당(殿堂)이며 실방(室房)이 참혹하게도 먼지처럼 되어 버리니 목탁소리가 나지 아니하고 죽색(竹色)도 진즉부터 죽어버리고 연못에 거북이만 나와서 햇볕을 쪼이고 소나무에 학만 돌아오니 이는 중과 보살들만 구슬퍼 할 바가 아니라 앎을 갖춘 사람들도 [선궁(禪宮)이 한번 폐함에 세상일이 슬프다]는 한을 품게 되었다.

수은은 불갑사의 중수기문을 끝내면서 법릉(法稜)에게 불갑사 중창(重創)을 위한 방법을 묻는다. 법릉(法稜)은 기다렸다는 듯이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막힘없이 말을 이어간다.


여기서 놀라운건 유교와 불교의 조화로움이다. 지금까지 세계사를 공부하면서 전 세계적으로 가장 자주 빈발하고 크게 번지는 게 종교전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릉(法稜)이 답한 말에 기인(基因)해 보면 유불논쟁뿐 아니라 마찰적인 요소가 조선에서는 전혀 없었고 오히려 각 지역의 사찰은 도학(道學)을 실천하는 도장이 곧 사찰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이건 우리 민족의 우수성이며 합리적인 조선의 통치이념이 작용하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민족이 우수성이 어떻게 보면 상대를 배려하고 상대를 인정해 주는 기본틀이 되어 있는건 아닐까?!


법릉(法稜)스님의 불심과 각오

법릉(法稜)이 말하기를 “나는 불자입니다. 불자가 이 불사를 짓는데 인연과 업보를 버리고 무엇으로 사람들에게 말하겠습니까?” <중략> 인정으로써 말씀드린다면 모든 노선생들이 반드시 “이 절은 내가 어렸을 때에 글을 읽던 곳이기에 없어진 것을 내가 서운해 하였는데 다시 지은 다는데 어찌 정이 없겠느냐”하실 것이요,


자손과 제자들은 반드시 “이 절은 우리 어르신이 글을 읽던 곳이기에 없어진 것을 내가 서운해 했는데 이제 다시 지은다고 하니 내가 어찌 정이 없겠는가?”할 것이며, 어린 아들을 둔 분은 반드시 “우리 애가 공부를 하게 되면 반드시 이 절에 가서 할 것이니 내가 어찌 돕지 않겠는가?”할 것이요,


동자들은 “내가 열다섯(成童)이 되면 반드시 이 절에 가서 공부를 할 것이니 내가 어찌 돕지 않으리요.”할 것이니, 그렇게 되면 금전과 재물이며 소와 말, 베와 비단, 옷가지와 음식을 반드시 아끼지 않을 줄로 압니다. <중략> 뭇사람이 말하기를[옳네 옳아]하므로 이 말을 써서 글장(卷子)을 만들었노라.


 

수은 선생의 불갑사 중수기문을 정독(精讀)하면서 400여년이나 지금이나 사람 사는 세상은 거의 비슷하거나 같다는 걸 새삼 공감한다. 지금보다 첨단 기술만 발전하지 못 했지 인간의 심성(心性)은 그 학문의 깊이에 관계없이 똑같은 거라 여겨진다. 다만 우리나라가 다문화로 글로벌화되면서 좀 더 인성과 인문학 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할 시점이 다가왔다.


필자는 시간이 나는대로 꼭 반복해 강조한다. 사람 사는 세상에서 올바르게 정착된 심성(心性)과 인성(人性)이 부모의 훈육(訓育)으로 잘 길들여져 사회공익에 도움이 되는게 가장 중요하며 이러한 인성을 잘 다듬어 우리나라이라는 뿌리문화의 브랜드로 소중함이 계속 이어졌으면 하는 바람이 오늘따라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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